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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10. 2019

간호대 학생

내 과거로의 여행 #4


처음부터 간호대학에 갈 생각은 없었다. 수능을 잘 보지도 못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냥 이런 저런 4년대는 갈 수 있는 정도였다. 3년 내내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내신 성적은 그나마 좋았지만, 기초가 없었던지 모의고사에서는 번번히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마지막 수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셋째언니도 대학을 가고 싶은 곳으로 가지 못했다. 문제는 학비였다. 결국 언니는 별로 관심도 없는 전문대 피부미용학과에 가서 2년만에 졸업을 했다. 그리고 바로 돈을 벌게 되었다. 나 또한 국립대에 들어갈 점수는 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비싼 사립대를 갈 수도 없었다. 어느 날 고등학교 벽에 붙어있는 간호대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기독간호대”였다.

‘그래, 바로 여기야’

마음을 정한 후 담임 선생님에게 말했다.

“전 4년대 안 가려구요. 간호대에 지원하겠습니다. 그래서 논술 준비는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그래? 소신 있어서 좋구나. 그래, 네 뜻대로 하렴.”

선생님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뜻을 받아드렸다. 선생님도 애매한 내 점수로 좋은 대학에 가기에는 힘들 것이라 생각 했나 보다. 그렇게 갑자기 간호대에 가게 되었다.

우리들은 우스갯 소리로 종종 말한다.

“간호대 3년은 고등학교 4,5,6 학년이야.”

그만큼 공부할 게 많았다. 1학년 1학기부터 의학용어 수업이 있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의학용어를 달달 외우고, 신체의 각 부위와 근육, 뼈, 혈관 이름을 외워야 했다. 정말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게 너무 재미있었다. 간호사가 될 생각을 한번도 해보지 못했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재미있고 나에게 딱 맞다는 생각을 했다. 매주 의학용어 시험을 보았다. 그 때 마다 밤 새워 외웠다.

부모님에게 학비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죽어라 공부했다. 고등학교 때 보다도 더 공부를 했다. 시험기간이 되면 며칠씩 밤을 샜다.

간호학과 하나 있는 단과대학에서 캠퍼스의 낭만은 없었다. 그리고 같은 학번에 남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1년 선배 중 남학생이 2명 있었는데 한 분은 수사님이었고, 한 분은 나보다 10살이 많은 경훈 선배님이었다. 경훈 선배는 여러 학생들을 잘 챙기고 도와주는 분이었는데, 나중에 나에게 기초 벵골어 책을 보내 주시기도 했다.

대학 2 학년 때부터 2주씩 병원 실습을 나갔다. 병원 실습이 힘들기는 했지만, 또 다른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https://unsplash.com/@rawpixel

2학년 2학기, 나와 친했던 춘이 언니가 총학생회장이 되었다. 우리학교는 기독교 학교였고, 간호 단과대였기 때문에 다른 학교와는 학생회의 모습이 조금 달랐다. 학생회는 학교의 여러가지 예산을 짜고, 준비하고,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노력하는 위원회였다. 그리고 종교부가 있었다. 종교부에서는 매주 목요일 채플을 준비하고 찬양을 인도하는 일을 주로 했다. 언니는 나에게 종교부장을 맞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때까지도 존재감 없이 조용히 학교를 다니고, 공부만 하던 나였는데 그런 부탁을 받으니 많이 고민이 되었다. 예배를 준비해야 하고, 전교생이 모인 예배에서 찬양인도를 해야 했다. 그런데 종교부장이 되면2/3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전에 장학금을 몇 번 받긴 했지만, 종교부장이 되면 1년 동안 학비의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소심하던 내 모습을 탈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언니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 뒤로 1년동안 예배 준비를 했다. 담당 목사님과 상의하고, 주보를 만들고, 찬양을 준비하고, 찬양단을 이끌었다. 말주변이 좋지 않았던 난 밤마다 성경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렇게 하면 왠지 목소리도 더 좋아지고, 말도 더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소심하던 나에게 그건 정말 큰 도전이었다. 그리고 ccm가수가 되고 싶었던 사춘기때의 꿈을 어느정도 이룰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간호대학을 다니면서 어렸을 적 인정받지 못한 나의 내면이 많이 회복되었다. 항상 무표정했던 얼굴에는 미소가 생겼다. 사람들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던 내가 전교생이 모인 예배시간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으로 받으며 찬양을 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사건은 3학년때 ‘올해의 나이팅게일’ 후보가 된 일이었다. 3년제 간호대에서는 1학년 2학기 가을이 되면 ‘나이팅게일 선언식’을 한다. 그 후 2학년이 되면 실제 병원에 나가 실습을 할 수 있게 된다. 나이팅게일 선언식 에서는 특별히 ‘올해의 나이팅게일’이 함께하는데, 전교생의 투표로 뽑힌 단 한 명의 졸업반 선배가 1학년 후배들에게 촛불을 밝혀주는 가장 의미 있는 행사이다. 난 비록 최종 1명이 되지는 못했지만, 최종 2명 중 한 명이 되었다. 내 이름이 투표용지에 적힌 걸 봤을 때 알 수 없는 전율이 흘렀다. 그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날 뽑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내 이름 석자가 거기에 적혀 있는 것 만으로도 이미 행복했다.



대학 3학년이 되던 해, 남동생이 대학을 가야했다. 난 여전히 남동생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동생이 수능을 보고 이런 저런 진로를 고민할 때였다.

“간호대에 한번 써보는 거 어때? 내가 보니까 남자 간호사가 취업도 바로 되고 대우도 좋아. 우리 선배는 공부 못했는데 서울 큰 병원에 바로 들어 갔어.”

“그래? 그럼 한번 써볼까? 근데 난 서울로 가고 싶어.”

“서울, 경기지역에도 간호대가 많으니까 한번 알아봐. 그런데 아빠가 찬성할지 모르겠네.”

그 당시 남자간호사는 매우 귀한 자리였다. 여자 간호사들 사이에서 힘들기는 하겠지만 취업이 매우 잘 되는 편이었다. 그냥 한번 던진 말에 동생은 진지하게 고민을 하더니 덜컥 간호대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반대할 것만 같았던 부모님도 동생의 진지한 고민을 이해했는지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남동생도 경기도 어느 대학의 간호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난 졸업하자 마자 바로 병원에 취직을 해 진짜 간호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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