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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Nov 20. 2019

8. 모래시계

[소설] 셀 게스트하우스로 가는 길

 

설화는 마야라는 여자의 얼굴만 확인하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퍼즐이 맞춰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모든 궁금증을 버리고 이곳을 떠나리라 생각했다. 아빠에 대한 그리움도 미안함도 모두 함께 이 게스트하우스에 묻어버리고 떠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도록 마야라는 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안비에게 물어봐도 곧 온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아무도 그녀가 언제 오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흘이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설화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일주일 계획하고 온 마리가 두 달째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그 전날 밤 이후 설화는 하야꼬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20대 중반의 하야꼬 목소리는 매우 하이톤이었는데, 하야꼬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가 있었다. 하야꼬의 목소리가 들릴 때 설화는 방안에 틀어 박혀 있다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비로소 문 밖으로 나가곤 했다.

 

아침 시간이면 사람들이 모두 모여 카레와 밥, 빵을 먹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설화는 아침마다 자는 척을 했다.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야꼬와 마주치기 싫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그 카레 냄새를 맡고 싶지 않아서였을지도.


‘내가 그렇게 경우 없는 애가 아닌데. 모두 술 때문이야....

아니야, 진실을 말한 거잖아? 일본 사람들도 알건 알아야지....

그렇다고 그렇게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 모르겠다.’

설화는 침대에 누워 자신의 말실수를 곱씹고 곱씹으며 시간을 보냈다.

더욱이 강철과는 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니.

설화는 강철이 자신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최초의 편집자였으며, 그 원고를 거부했고, 그만두었고, 여기까지 왔음을.

 

여행이란 낯선 자들 사이에서 낯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라는데, 설화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심하게 낯설다 못해 한심하게 느껴졌다.

 

설화는 점심때가 다 되어 몸을 일으켰다. 여기까지 와서 이불에 파묻혀 누워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검은색 크로스백을 매고  게스트하우스를 나가보리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온 후 한 번도 거리에 나가지 못했다. 그저 먼발치에서 눈으로만 보고 있었다. 낯선 풍경 속으로 자신이 들어가면 그건 어떤 그림이 될까?

낯섦과 익숙함은 의지에 달린 문제였다. 이제 저 거리로 걸어 들어간다면 저곳은 익숙한 곳이 될 것이다.

 

설화는 게스트 하우스 문을 열고 낯선 곳을 걸어 들어갔다.

 


한 무리의 서양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작은 가게에서는 여기 좀 보라며 손짓을 했다. 여러 대의 릭샤가 그녀 옆에 섰다 지나갔다. 그러다 설화의 눈길을 잡아 끄는 문구를 발견했다.

[한국 사람 환영합니다. 들어와서 구경하세요. 할인해드립니다.]

한글이었다. 그 아래로 영어, 중국어, 일본어가 적혀있었다. 낯선 곳에서 만난 우리말이 이상하게 더 낯설게 느껴졌다.


“헤이. 한국사람이에요? 들어와서 구경해요. 좋은 물건 많아요.”

설화는 흠칫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기념품을 파는 가게였다. 인중에 까맣게 콧수염이 나 있는 사람이 설화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설화는 그 남자를 보며 찰리 채플린을 떠올렸다.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었지만, 콧수염과 웃고 있는 얼굴 하나로 그가 꼭 그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기념품 사세요. 새로 들어온 게 많아요. 내 친구도 한국 사람이에요.”

설화는 친구 미영에게 선물이나 하나 사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 가게로 들어갔다. 한 벽면 가득 마그네틱이 붙어 있었다.

“타지마할 알죠? 이 마그네틱이 가장 인기 있어요. 한국 사람들이 워낙 좋아하니까.”

“잠깐 둘러볼게요.”

“네 네. 천천히 둘러보세요.”

안쪽에서는 여러 힌두 신들의 모형 조각상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손이 여러 개인 조각상, 얼굴이 코끼리인 조각상, 옷을 전혀 걸치지 않은 어느 여인의 조각상.

설화는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조각상들이 자신에게 뜨거운 눈빛을 보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설화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모래시계였다. 앤틱 스타일에 보라색 모래가 담겨있는 모래시계였다. 설화는 그 모래시계를 들어 반대로 뒤집어 놓아 보았다. 이내 보라색 모래들이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위쪽에 있던 모래가 아래쪽으로 모두 내려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 듯했다. 설화는 그 모래시계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거 3분이에요.”

“네? 단지 3분 이라고요? 더 걸린 것 같은데….”

“흥흥흥. 시간은 가끔 상대적일 때가 있죠.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은 부끄러워서 더 천천히 흐르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있으면 시간은 질투를 해서 막 빠르게 달음질치죠.”

“아…. 네.”

설화는 찰리 채플린 같은 기념품 가게의 주인을 한번 더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거 얼마인가요?”

“원래 500루피인데, 싸게 드릴게요. 450루피.”

“아, 고마워요.”

설화는 모래시계를 들고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 살게요. 시간의 의미를 알려주셨으니.”

그는 설화에서 모래시계를 건네 받고는 옆에 놓인 신문지에 쌓기 시작했다.

“그거 알아요? 모든 사물은 어느 곳에 담기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와 용도가 달라진다는 거.”

“그건 무슨 말인가요?”

“이거 보세요. 모래는 원래 바다에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모래가 지금 여기 담겨있죠.”

그는 모래시계를 가리키며 말을 했다.

“아무도 이걸 그냥 모래라고 하지 않아요. 이제 이건 시계가 된 거죠. 공사장으로 간 모래들은 뭐가 될까요? 그 모래들은 여러 가지 물질과 섞여서 시멘트가 되겠죠?”

“아…. 그러네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마음의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는 거예요.”

“그건 힌두교의 사상인가요?”

설화의 말에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아니에요. 이건 라자의 말이에요.”

“네? 라자가 누군데요?”

“바로 나.”

그는 한번 더 하하 웃으며 모래시계를 설화에게 건넸다. 설화는 검은색 크로스 백의 지퍼를 열고 지갑을 꺼내 500루피를 꺼냈다.

“거스름 돈은 필요 없어요. 그냥 500 루피에 살게요.”

“오, 정말요? 고마워요. 신께서 당신과 함께 하길, 나마스떼.”

그는 두 손을 모아 이마에 대며  설화에게 목례를 했다.

 

설화는 가게를 나오며 모래시계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 마음의 그릇은 지금 어떤 상태인 걸까?’

 

갑자기 어린아이들 세 명이 설화에게 다가왔다. 아이들의 옷은 찢어져 있었고 신발은 신고 있지 않았다. 아이들의 얼굴과 손에는 때가 묻어 있었다.

“헬로, 텐 루피”

“아임 헝그리, 짜빠띠, 짜빠띠**”

설화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이 아이들을 내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녀의 옷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디디~ 텐 루피~”

설화는 검은색 크로스백의 지퍼를 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야 너희들. 이리 와 봐.”

아이들은 그 목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더니 우르르 달려갔다.

“자, 이거 먹고 가거라.”

“땡큐, 땡큐”

그는 손에 있던 빵을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건네주었다. 그리곤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이언 맨이었다.

 



** 짜빠띠는 인도사람들이 아침으로 먹는 음식으로 밀가루로 만든 부침개 모양의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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