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가 말을 걸다.
지난여름에 주문했던 책이 얼마 전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뭄바이로 새로 오시는 분께서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컨테이너에 함께 실어 보내주겠다고 하셨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바로 아이들 책이었습니다.
저희 집에는 치타공에서 다카로, 다카에서 뭄바이로, 뭄바이에서 델리로 함께 건너온 책들이 가득 있는데요, 새 책을 사기 힘든 곳에 살다 보니 읽던 책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으며 지냈답니다. 아이들도 저도 새 책에 목말라 있었죠.
너무나 고마운 그분의 도움으로 새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어요.
제가 고심하고 고른 책은 세계명작동화와 시공주니어 초등 동화였어요. 그림보다 글이 많은 책들인데, 아이들의 읽기 수준을 한 단계 올려 주고 싶었습니다. 세계명작동화는 제가 어렸을 적에 시골 온돌방에 배 깔고 누워 읽었던 책들이라서 아이와 함께 읽고 싶었어요.
제가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는 시간은 잠자리 시간이에요. 함께 잠자리에 누워서 제가 책을 읽어주면 아이들은 양쪽에 누워서 책 속의 글자를 눈으로 따라 읽기도 하고, 그림을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소은이는 어느새 잠들어 새근새근 숨소리를 냅니다. 지안이는 절대 먼저 자지 않고 책 한 권을 다 읽을 때까지 버팁니다.
아이들과 함께 모험이 가득한 80일간의 세계일주, 15 소년 표루기, 톰 소여의 모험, 비밀의 화원, 로빈슨 크루소, 해저 이만리 책을 읽은 후 어린 왕자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전 조금 걱정이 되었었어요. 어린 왕자는 다른 책들이 비해 흥미로운 모험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미있는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아이들이 지루하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했거든요.
저는 그 책을 고등학생 때 처음 읽었습니다. 필독도서였기도 했고, 여고생이 어린 왕자를 모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던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솔직히 말하면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뭐가 감동이라는 거지? 어린 왕자와 장미의 관계가 뭐가 특별하다는 것인지, 여우를 길들이는 일이 뭐가 대단하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어린 왕자의 마지막 장면이 조금 충격적이었달까요.
그래도 책을 펼치고 책을 읽었습니다. 제 아이들이 이 책을 어떻게 느낄지 궁금하기도 했어요.
어린 왕자에 나오는 첫 그림, 생각나시나요?
이 부분을 읽는데 지안이와 소은이가 웃음을 터트렸어요. 뭐가 웃기다는 거지? 아이들은 이 그림이 웃기다고 했습니다. 전 단 한 번도 이 그림을 보며 웃은 적이 없는데...
“아저씨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
“ 아냐, 아냐! 난 그냥 아무렇게나 대답한 거야. 난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느라 무척 바쁘거든. 그러니까 자꾸 말 시키지 마!”
“중요한 일?”
나는 그때 비행기의 나사를 돌리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아저씨도 다른 어른들처럼 말하는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순간 뜨끔 했어요.. 꼭 제 모습을 보는 듯했거든요. 살며시 아이들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소은이는 어느새 잠들어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고 있었고, 지안이는 큰 눈을 꿈뻑이며 책 속의 그림을 보고 있었어요.
엄마도 그저 그런 어른이라는 사실을 아이들도 알고 있겠죠? 들켜 버린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꽃의 말이 아닌 행동을 바라봐야 했어. 그저 바라만 보고 향기만 맡으면 되는 거였는데. 그 꽃은 내 별을 향기롭게 해 주었는데, 난 그걸 고맙게 여길 줄 몰랐어. 호랑이 얘기도 사실은 나의 관심을 끌려고 한 건데, 그땐 그걸 몰랐어.”
전 이 책을 읽으며 제 아이들을 떠올렸습니다. 어린 왕자의 장미가 꼭 제 두 아이처럼 느껴졌어요.
“아이들의 말이 아닌 행동을 바라봐야 했어. 그저 바라만 보고 향기만 맡으면 되는 거였는데. 내 아이들은 내 집을 향기롭게 해 주었는데, 난 그걸 고맙게 여길 줄 몰랐어. 친구들 얘기도 사실은 엄마의 관심을 끌려고 한 건데, 그땐 그걸 몰랐어.”
“잘 가. 그리고 내 비밀은 무엇이든지 마음으로 볼 때 가장 잘 보인다는 거야. 아주 간단하지?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거든. 그리고 하나 더. 네 장미꽃이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였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이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어. 하지만 넌 절대 잊으면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 넌 언제나 책임을 저야 해. 그러니까 넌 네 장미를 책임져야 하는 거야. 내 말 꼭 기억해!”
여전히 어린 왕자의 마지막 모습은 제 마음을 헛헛하게 만들었어요.
“ 아저씨 눈엔 내가 죽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게 아니야. 내 별이 너무 멀어서 무거운 몸으로 갈 수 없을 뿐이야. 뭐, 상관없어. 몸은 껍데기일 뿐이니까.”
껍데기일 뿐인 무언가를 위해서 우린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가요.... 무거운 몸에 짊어지고 가는 짐은 또 얼마나 버거운가요... 우리가 우리의 별로 돌아가는 마지막, 무거운 몸을 벗고 나면 많이 가벼울까요? 진짜 그럴까요?
자신의 장미에게 책임을 다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 왕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난 지금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여기라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겼습니다.
다행히도 어린 왕자처럼 우주를 돌고 돌지 않아도 돼서 다행입니다.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바로 내 옆에 누워있는 아이들 곁이 내 자리니까요.
우연히 브런치 북에서 어느 작가님의 글을 읽게 되었어요. 어린 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의 또 다른 책 "인간의 대지”를 읽고 사하라 사막으로 떠난 작가님이었습니다.
작가님은 사하라 사막에서 생텍쥐페리의 글을 따라 걸었습니다.
작가님은 사막에서 열 가지를 배우셨대요.
1.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경이라는 것
2. 이빨을 닦고 샤워를 하는 일상의 행위가 성스러운 행위라는 것
3. 물은 삶이라는 것
4. 별과 달은 인터넷이나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하다는 것
5. 고요는 그 무엇보다 값진 것이라는 것
6. 사막에서도 비 몇 방울로 식물과 나무 및 생명이 자란다는 것
7. 사막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것
8. 홀로는 결코 사막을 건널 수 없다는 것
9. 광활한 사막 안에 우리 존재는 왔다가 가는 바람과도 같다는 것
10. 아무것도 없을 때 모든 것이 보인다는 것
전 작가님의 글과 사진을 보며 제 아이와 읽은 어린 왕자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전혀 모르는 사람이던 그 작가님이 갑자기 엄청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이게 바로 글의 마력일까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책을 읽고 느끼는 포인트가 다르겠죠. 여고생일 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글이 지금은 다르게 느껴집니다.
전 지금 두 아이의 엄마인지라 어린 왕자의 글 속에서 엄마의 마음을 발견했어요.
당신은 어떤 마음을 발견했나요?
아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 뭐가 제일 재미있었어?”
“장발장이랑 어린 왕자.”
“그래? 왜?”
“그냥. 재밌던데.”
아이는 그 책 속에서 어떤 마음을 발견했을까요? 나중에 엄마처럼 마흔이 된 후에는 또 어떤 마음으로 변할까요?
제가 바라는 것은, 내 기억 속의 어린 왕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와 마흔 살의 나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걸어 주었듯, 마흔이 된 내 아이에게 한번 더 말을 걸어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흔의 내 아이가 책 읽어주던 마흔의 엄마 목소리를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