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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일상적인 하루가 소중한 이유.

by 선량

한 달 전 즈음,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재래식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응가들이 막 넘쳐서 제 몸을 뒤덮어 버리는 꿈이었습니다.(상상하진 마세요.)

그 꿈을 꾸고 어찌나 기분이 더럽고 어이가 없던지요. 하지만 제 기분과는 다르게 인터넷 꿈 해몽에서는 꽤 좋은 징조라고 알려주었답니다. 좋은 일이 생길 거라면서요.

연말을 맞아 책 출간도 했고, 여기저기서 축하도 받고 나쁘지 않았습니다. 작년 한 해를 잘 마무리한 것 같아 나름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 며칠 기분이 자꾸 다운되었습니다. 세상엔 그림 잘 그리는 사람도 정말 많고,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정말 많고, 멋지게 인생을 사는 사람도 정말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거든요.


누군가는 나를 보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단 마음도 들었어요. 하지만 정작 저는...

어설픈 제 그림이 좀 부끄러워서 손을 놓은 지 몇 달 되었어요. 글쓰기는 매일 하고 있지만, 진전이 없는 것 같고, 출간은 했지만, 내가 진짜 작가는 아닌 것 만 같습니다. 이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도 많이 되었고요. 새해를 힘차게 출발해야 하는데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어요.


약간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 혼자 불금을 보냈습니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혼자서 지나간 한국 드라마를 보는 거예요.

이미 철 지난 드라마를 한꺼번에 보는 재미란, 배우들을 통해 로맨스를 간접 경험하면서 빠르게 결말로 내달릴 수 있으니. 성격 급한 저에게 불금을 보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아이템입니다. 드라마를 보는 시간만큼은 걱정도 근심도 없이 울고 웃을 수 있습니다.


드라마를 보느라 새벽 3시에 겨우 눈을 감았어요. 토요일은 남편도 출근을 하지 않으니 여유롭게 늦잠을 잘 생각이었습니다.


한참 자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절 불렀어요. 휘청휘청 다가오는 그가 아슬아슬해 보였습니다. 머리가 너무 어지럽다며 쓰러지듯 주저앉아버립니다. 갑자기 공황 발작이 왔나 생각했습니다. 급하게 남편 가방을 뒤져 약을 꺼내 주었죠. 급하게 약을 털어 넣고 물을 마시는 그의 옆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내 구토를 시작했어요. 어지러워하던 남편은 눕지도 못하고 앉아있어야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8시가 다 되어 겨우 눈을 붙였다가 10시에 일어나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었습니다. 이건 공황 증상이 아니었거든요.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급하게 아이들에게 아침으로 크레페를 만들어 주고는 휘청이는 남편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처음 가 본 인도의 병원에는 토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어요. 겨우 접수를 하고 의사를 만났습니다. 남편은 엉덩이 주사를 한대 맞고 앉아 있었어요. 전 수납을 하고, 약을 타오고, 남편의 손을 잡아주고, 주물러 주고, 그를 부축해 주었습니다.


그의 증상을 보니, 이석증 같았습니다.

[이석증 : 이석은 반고리관 주변에 위치하면서 균형 유지에 관여하는 물질입니다. 어떤 이유로 인해서든 이석이 원래 위치에서 떨어져 나와 반고리관 내부의 액체 속에서 흘러다거나 붙어 있게 되면 자세를 느끼는 신경을 과도하게 자극하여 주위가 돌아가는 듯한 증상을 일으킵니다.]

약을 먹고 남편은 오후 내내 쓰러져 잠을 잤습니다.


남편을 집에 바래다주고 다시 마트에 가서 장을 봐 왔어요. 집에 돌아와 설거지 및 빨래 등 집안일을 하고, 점심을 만들어 아이들 먹이고, 야채죽을 만들어 남편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쓰러져 자고 있는 남편 옆에 누워 같이 잠들어 버렸네요.


2020년의 첫 주말.

한국에서는 제 동생의 아들 돌잔치가 있었어요. 시골 사시는 부모님이 서울에 오셔서 온 가족이 모여 귀여운 아기의 돌을 축하하고 있었지요. 가족들 사진이 카톡으로 계속 올라왔습니다.

그 시각, 저희 가족은 엉망진창의 정리되지 않은 거실에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시간은 황망하게 흘러갔고 밤이 되어버렸습니다.


주말에 실컷 자고 일어나 혼자서 스타벅스에 갈 계획이었습니다. 노트북도 챙겨가서 글도 쓸 참이었어요.

남편은 주일날 교회에서 베이스 기타를 치려고 열심히 연습했었습니다. 야들야들해진 손가락에 다시 굳은살이 박히도록 연습했어요.

하지만 저희 둘 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픈 남편을 보면서 생각의 가지가 끝도 없어 뻗어갔습니다.

이 어지러움증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남편이 다시 정상적인 삶을 못한다면? 우린 어떻게 하지?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할까? 그럼 우린 어디로 가야 할까? 순천으로 갈까? 거기서 뭘 먹고살까? 난 다시 병원 일을 하긴 힘들 것 같은데? 책을 출간하긴 했지만 여전히 글쓰기 지식이 부족해서 강연도 힘들 텐데?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좀 더 공부도 하고 자격증도 있어야 할 텐데? 요양 보호사 자격증을 따 볼까? 힘들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 일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한국 가면 적응이나 할 수 있을까?


이미 생각은 끝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었습니다. 마치 드라마의 결말을 빨리 알고 싶어 15초 앞으로 건너뛰기를 하는 것처럼.



내가 생각하고 바라던 데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꿨던 똥 꿈으로 책이 대박이 나고, 돈 한 푼 벌지 못했던 주부에게 수입이 생기고, 좋은 일이 가득 생기고.

그랬다면 참 좋았을탠대, 역시나 바라는 데로 모든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파서 누워있는 남편을 보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어요. 그건 심심한 일상이 아니라 감사한 일상이었어요.


내 책이 대박 나지 않아도, 출간이 되어 서점 매대에 누워 있음에 감사합니다.

여전히 돈 한 푼 벌지 못하지만, 생활비를 받아 쓸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좋은 일이 매일 일어나진 않지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음에 감사합니다.

남편이 오늘은 조금 호전되어 몸을 일으킬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그래서 다시 글을 씁니다.

어설픈 글이라도 읽어주는 분들이 계시니, 작가의 서랍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합니다.

뭔가 부족한 것 같지만, 더 이상 수려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발행의 용기를 내어봅니다.

오늘도 심심한, 아니 소중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평범한 일상은 없다는 것을, 매 순간이 모두 특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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