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며느리 사표를 낸 것은 아니지만, 며느리 역할을 하지 않은 지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며느리 역할이라 함은 한국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바로 그런 것들이죠. 매주 전화를 드린다거나, 생신날 선물을 한다거나, 자주 찾아뵙고 맛있는 것을 함께 먹는다거나, 손주들과 영상통화를 한다거나. 그리고 가장 며느리 역할이 필요한 명절날 함께 전을 부치는 일 같은 것이겠죠.
그런데 전 결혼 후부터 거의 이런 역할들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결혼하자마자 큰아이가 생겼고, 설을 앞두고 아이가 태어났으니. 귀성길에 오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그 후로는 주욱 해외 생활 중이니, 명절은 그저 고향을 그리워하는 여러 날들 중 하루일 뿐이랍니다.
오늘 아침, 남편이 어머님께 전화를 했어요. 어머님은 일을 하고 계셨죠. 남편과 어머님은 서로 몇 마디 대화를 하고는 그냥 끊었습니다. 전 바로 옆에 있었어요. 아이들도 있었고요. 하지만 전화를 바꿔 주지도, 바꿔 달라는 말도 없이 통화는 끝났습니다.
이 모습은 저와 어머님의 관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사이가 나쁘냐고요?
사실, 사이가 나쁘지도 그렇다고 엄청 좋지도 않습니다. 그냥 서로 뭔가 기대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저희는 어머님을 일 년에 한 번 만납니다. 한국에 휴가 갈 때나 만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가서도 어머님이 일 하느라 바쁘시니까 어머님 댁으로 가지 않습니다. 통영에 널린 여러 숙소 중 하나를 잡아서 지내죠. 그리고 어머님을 만나 밥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함께 공원에 가서 놀다가 헤어집니다. 헤어질 때 어머님은 꼭 용돈을 주세요. 전 선물을 드리고요.
약간 아메리칸 스타일의 시어머니지만 해외여행 한 번도 안 해보셨어요. 남편은 그런 어머님의 성격을 쏙 빼닮았어요.
저희 친정은 전형적인 한국 스타일의 대가족 문화입니다. 어려서부터 명절만 되면 친인척들이 다 모여 먹고, 놀고, 술 마시고 고스톱 치며 놀았어요. 전 그게 너무 좋았습니다. 부엌에서 하루 종일 전을 부치는 것도,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것도 재밌었어요. 그게 힘들기는커녕 명절날 사람들을 만나 웃고 떠들며 먹는 일이라는 생각에 신이 났습니다.
지금은 이도 저도 못하는 환경이지만, 명절이 되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런 삶이 가끔은 너무 심심하기도 하네요.
저는 빵점짜리 며느리예요. 그에 비해 어머님은 저에게 백 점짜리 시어머님이시죠.
며느리 역할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부담도 주지 않으세요. 그리고 여전히 한국에 가면 용돈을 주시죠. 그래서 그런지 항상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어머님은 절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속으론 서운해하실까요?
하지만 그런 내색 전혀 안 하시니, 서로 쿨한 관계로 지냅니다.
이런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어머님의 경험 때문인 것 같아요. 본인이 시어머니 때문에 많이 힘드셨거든요. 그래서 더 저한테 부담을 안 주시려 하는 것 같아요.
남편의 역할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본인도 엄마에 대해 몹시 쿨~ 하거든요. 제 부모님에겐 내가 연락하고, 시어머님에겐 남편이 연락하고. 서로 각자의 부모님께 알아서 잘하면 됩니다.
사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저희 부모님들은 저희가 어려서부터 저희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아요. 한국 문화에 존재하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끈끈한 애정(이라 부르고 집착이라 표현되는)이 저희들에게 없습니다.
누구는 “정이 너무 없다.”라고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전 약간의 거리가 오히려 서로에게 더 좋은 것 같아요. 서로 상처 받을 일이 없거든요. 그래서 전 당당하게 말합니다.
빵점자리 며느리라고요.
전 제 아이들에게도 이런 엄마가 되고 싶어요.
퍼주고 퍼주다가 결국엔 애정보다 과한 집착으로 아이들을 쥐고 흔드는 엄마가 되고 싶진 않습니다. 쿨내 진동하는 엄마가 되고 싶은데, 과연 제 어머니처럼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런 말을 하면 다들 부러워합니다. 진짜 좋은 시어머니라고요. 맞아요. 제 어머님 정말 좋으세요. 그래서 언젠간 며느리 역할을 제대로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언젠간 어머님의 삶을 글로 써보고 싶기도 하네요.
새해 첫날.
저도 떡국을 끓였는데요, 아주 심하게 조촐한 떡국 상이 되었어요.
친정에 모인 언니들이 보내 준 상다리 휘어지는 식탁을 보니 군침이 돕니다. 어쩌겠어요. 이게 제가 선택한 삶인걸요.
이 아침 떡국 한 그릇과 김치 하나가 꼭 제 삶 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