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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12. 2019

두려움의 시간들

다시 돌아온 방글라데시는 예전의 그곳이 아니었다.

10개월 만에 남편은 방글라데시 다카로 발령을 받았다. 우리는 다카로 가기 전에 먼저 치타공으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온 치타공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집안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기에 여기저기 곰팡이가 많이도 피어 있었다. 남겨두고 간 옷에서 곰팡이 냄새가 진동을 했다. 다카에 집을 구하기 전에 그 집에서 당분간 살아야 했다.


모든 옷들을 꺼내 빨기 시작했다. 세탁기가 고장이 나 손빨래를 했다. 집안 여기저기 예쁘게 피어 있는 곰팡이를 닦고 닦고 또 닦았다. 그래도 매캐한 곰팡이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남편은 우리 셋을 남겨두고 다카로 떠났다. 다카에 있는 회사에서 일을 시작해야 했다. 남편이 일을 하면서 집을 구하기로 했다. 그 당시 방글라데시에서는 몇번의 외국인 테러가 있었다. 봉사활동 하던 일본인, 길에서 조깅을 하던 이탈리아 사람들이 이유없이 총에 맞는 사건이 있었다. 한번도 없었던 일이 갑자기 발생해서 방글라데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긴장을 했다. 나라가 폐쇄적이긴 했지만 위험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어디를 가나 긴장을 해야 했다. 다시 돌아온 치타공은 그대로였지만, 방글라데시는 변해 있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남편도 없이, 차도 없이 지내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우리가 사는 지역은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는데, 다들 이곳이 표적이 된다며 조심하라고 했다. 우리가 유일하게 다니던 마트도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마트에 가려면 걸어서 차도를 건너야 했다. 두 아이를 데리고 그 곳을 가는 것이 너무나도 공포스러웠다. 매일 다니던 그 길이 공포로 다가왔다. 마트에 갈 때마다 교회 목사님께 부탁해 교회 차로 다녔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하던 그 길이 무서워 나가지 못했다. 옆집 언니 집에 갈 때 조차도 큰 마음을 먹고 기도하며 나갔다. 내가 좋아했던 그 동네가 이제는 공포의 동네가 되어버렸다.

혼자 다카에 있는 남편도 걱정이 되었다. 차가 없어서 릭샤와 CNG를 타고 다니는 남편을 보며 제발 아무런 사고가 없기를, 오늘 하루도 무사하기를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한참 IS(극단 이슬람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방글라데시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는 없는 그 두려움은 날마다 나를 괴롭혔다.


치타공 집은 2층이었다. 밖에 현관에서 보면 바로 우리집 베란다가 보인다. 그 전엔 느껴보지 못했던 위험요소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여자 혼자 두 아이를 데리고 거기에 살고 있다는 소문이 날까 무서웠다. 누군가가 벽을 타고 우리집 베란다로 들어오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에 떨었다. 베란다에는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었다. 실체 없는 두려움은 오만가지의 두려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아이들은 여전히 책을 읽으며, 이런 저런 놀이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난 잠들지 못했다. 밤에 자다가도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바람 소리에도 온 갖 신경이 곤두섰다. 밤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는지 모르겠다. 밤마다 기도하며 뜬눈으로 보냈다.

급기야 내 양쪽 귀에서 진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몇 달 전부터 귓속이 심하게 가렵고 아파서 병원 진료를 받았었다. 재발을 한 모양이었다. 내 두 귀는 미치도록 가려웠다. 그리고 한없이 진물이 흘러나왔다.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갈 수도 없었다. 아는 병원도 없었고, 차도 없었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밤마다 눈물로 기도를 했다.

가장 힘들 때 할 수 있는 것은 내 신앙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집에 있으면 더 힘들어서 교회의 모든 모임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금요 예배, 일요일 예배, 기도회를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했다. 집에만 있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하루하루 견뎌야 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 함께해주세요.”

나의 기도는 저 두 문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저 두 문장의 기도에 온갖 두려움, 아픔, 하루의 고단함이 들어 있었다.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지새우며 기도를 했다. 하루라도 빨리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렇게 두 달을 보내고, 드디어 다카에 집을 구해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삿짐을 싸던 그 날, 두 아이는 열이 펄펄 났다. 남편과 이삿짐센터 인부들이 짐을 실을 때 열이 펄펄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게스트 하우스에 있었다. 남편도, 나도 많이 지쳐 있었다. 방글라데시로 빨리 돌아오고 싶었다. 하루라도 빨리 내 살림이 있는 곳, 내 집으로 오고 싶었다. 다시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치타공에서 그 어느때보다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내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바로 다시 돌아온 치타공에서의 두 달이다.


내 가족에게 일어날 수도 있다는 그 모호한 두려움, 그건 교통사고에 대한 염려와는 다른 부분이다. 비행기를 탈 때 마다 조금씩 두려움이 있다. 이 비행기가 잘 날아서 잘 도착하기를 매번 기도를 한다. 알고 보니 나 같은 사람이 꽤나 있는 듯하다. 이런 말을 하면 다들 비슷한 마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테러에 대한 두려움은 비행기를 탈 때와는 또 다른 두려움이었다. 이슬람 국가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 익숙했던 동네가 무서움으로 다가오는 것, 익숙했던 사람들이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것, 혹시나 타겟이 되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두려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곳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살아내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다카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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