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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Mar 05. 2020

25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면허증

언니 이야기


오랜만에 네 자매 카톡방에 사진이 올라왔다.

잔뜩 부풀어 오른 앞머리를 스프레이로 고정한 언니의 사진. 그 사진이 부착된 영양사 면허증. 그리고 흰색 요리사 모자를 쓰고 그 면허증을 들고 서 있는 언니의 모습.

면허증에 붙어있는 25년 전 언니의 모습을 보고 웃음이 빵 터졌지만, 그것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40대 후반의 언니 모습을 보니 알 수 없는 아련함이 밀려온다.

내년이면 오십 대가 되는 큰언니가 취직을 했다.




우리 다섯 형제의 정신적 버팀목인 큰언니는 식품영양학과를 나왔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영양사 면허증과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그것들은 제대로 사용되지도 못하고 장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언니는 대학 졸업과 함께 간호학원을 다녔고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작은 아버지의 한의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방 두 칸짜리 3층이 집이었고 같은 건물의 2층이 한의원이었다. 언니는 아침에 일어나 동생들 도시락을 싸 주고, 간호사복을 입은 후 2층으로 출근했다. 점심때면 3층으로 올라와 할아버지, 할머니, 작은 아버지의 식사 준비를 했고 다시 2층으로 내려가 일을 했다.

오후 5시 반이 되면 언니가 일 하는 2층에 내려가 함께 만화영화를 보곤 했다. 피구 왕 통키, 나디아, 시간  탐험대 등.

저녁에 작은 아버지가 퇴근하시면 언니는 2층 한의원 청소를 하고 전기를 끄고 열쇠로 문을 잠근 후 3층으로 퇴근을 했다.



24살의 어린 나이에 형부를 만나 6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결혼 후 큰언니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혼하니까 너무 좋아. 내 일만 하면 되니까.”

그 뒤로 언니는 전업주부가 되어 아이 셋을 낳고 키웠다.


우리 다섯 형제는 사이가 많이 좋은 편이다. 그 이유가 바로 큰언니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큰언니와 둘째 언니 나이 차이는 겨우 1살이다. 그래서 어렸을 적에는 둘째 언니가 큰언니한테 함부로 말하기도 하고 대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큰언니가 둘째 언니를 두들겨 패 버렸고, 그 뒤로 큰언니를 깍듯이 언니로 모시고 있다.


얼마 전에는 큰언니가 거의 27년 전의 일기장 내용 일부분을 보내주었다. 거기에는 셋째의 사춘기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니까 큰언니는 우리에게 시골에 계신 엄마 대신이었다. 동생들의 사춘기를, 대학 생활을 직장 생활과 결혼을 옆에서 바라보며 도와주고 지지해주었다.



이런 언니를 우리 동생들은 정말 좋아한다. 항상 큰언니의 의견을 존중하고, 언니를 존경한다. 큰언니가 해주는 밥이 가장 맛있고, 큰언니와 함께 할 때 가장 즐겁다. 하지만 이건 나를 포함한 동생들의 입장일 뿐.

엄마는 왜 나를 큰 딸로 낳았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 쉬는 언니를 보며, 언니로서의 책임감과 부담이 얼마나 컸을지... 막내딸인 나로서는 가늠하기 힘들다.


둘째 언니가 결혼 후 서울에 자리를 잡은 것도, 셋째 언니가 두 아이를 낳고 여전히 워킹맘으로 일 할 수 있는 것도, 내가 필요한 게 있을 때 해외 택배를 부탁할 수 있었던 것도, 막내 동생이 대학을 서울로 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큰언니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이 동생들이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이런 언니가 항상 고맙고 미안해서 동생들은 좋은 것이 있으면 큰언니를 생각하고, 맛있는 것이 있으면 큰언니에게 연락을 한다.

친정 엄마가 신체적 어머니라면 큰언니는 정신적 어머니이다.



세 아이를 모두 키워 놓은 언니는 지금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다. 깊숙한 장롱 속에 숨어 있던 면허증을 꺼내 들고 세상을 향해  나가고 있다. 이런 언니의 행보는 나에게 긍정의 메시지를 보내준다. 언니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작은 희망의 씨앗을 심어 본다.



서랍 깊숙한 곳에 들어가 있는 간호사 면허증. 그 하나를 따기 위해 3년 동안 공부했고, 밤을 새워 공부했다. 그거 하나만 따면 성공한 삶인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삶이 그렇듯, 면허증이나 자격증이 내 삶을 풍요롭게 해주진 않았다. 더욱이 지금은

보수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아 간호사라고 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하지만 나도 언젠가는 언니처럼 그 면허증을 다시 꺼낼 날이 오지 않을까?

긴 시간 동안 가족들 밥해 먹이는데 언니의 능력을 모두 사용했던 것처럼. 하지만 다시 그 능력을 발휘할 시간이 온 것처럼.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25년 만에 다시 세상으로 나온 언니의 면허증은 나에게 말한다.

지금을 열심히 살아내라고.

그러다 보면 다시 사용될 날이 있을 거라고.

그때까지 성실한 삶을 살라고.

그리고 사십 대는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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