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처음 쓴 글
“엄마, 이거 뭐야? 냉장고에 뭐가 붙어있어.”
“뭔데?”
“그.. 냥.. 쉽.. 게.. 살.. 자..????”
“그게 뭔 말이야?”
“몰라. 냉장고에 붙어있어.”
“엄마~ 베란다에도 붙어 있어.”
“엥?? 뭐라고 쓰여있는데?”
“그냥... 쉽게.. 살자는데? 때 버릴까?”
“내버려두어. 아빠가 써 놨나 보네.”
“이런 말을 왜 써?
“쉽게 살고 싶나 보지.”
“때 버릴까?”
“냅둬. 아빠가 처음으로 쓴 글이야.”
“난 쉽게 살기 싫은데.”
“왜?”
“난 항상 어렵고 힘들어. 공부도 힘들고.”
“엄마 생각엔... 넌 이미 충분히 쉽게 살고 있는 것 같다.”
“아닌데...”
“내 생각엔.... 어제도 하루 종일 놀았고, 2시간 넘게 게임도 했고, 뒹굴뒹굴 거리고, 학교도 안 가고, 학원도 안 가고.... 더 쉬울 수 없을 것 같은데... 더 쉽게 살려면 밥 먹고 싸고 자고, 숨만 쉬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럼 아빠는?”
“아빠는 힘든가 보지.”
“내 생각엔 아빠도 이미 쉽게 사는 것 같은데.”
“왜?”
“맨날 우리한테 심부름시키지, 맨날 안마시키지, 맨날 혼자 유튜브 보지, 아빠 하고 싶을 때 게임하지,
우린 집 밖에 못 나가게 하면서 아빤 맨날 산책한다고 나가지.”
“음.... 듣고 보니 그러네.... 그래도 회사 일 하는 건 힘들겠지.”
“다른 아빠들은 회사 안 가?”
“음... 다른 아빠들도 회사 다니니까 다들 힘들겠지?”
“난 어른이 되기 싫어. 힘들게 회사 다녀야 하잖아.”
“헐.... 그러니까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 힘들다는 생각 안 드는 일.”
“그게 뭔지 모르겠어.”
“엄미도 그걸 몰랐고 아빠도 몰랐어. 이제 알아가는 거야. 좀 늦었지만 말이야.”
“그래서 아빤 쉽게 살고 싶은 거야?”
“엄마 생각엔, 우린 이미 쉽게 살고 있는 것 같다. 빚도 없고(집도 없긴 하지만), 가족들 아프지 않고(가끔 아프지만), 싸우지도 않고(가끔 다투긴 하지만), 아빠가 돈도 벌고(그러느라 스트레스받지만).
이보다 더 쉽게 살 수 있을까??
남들이 보기엔 우리가 엄청 치열하게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일 거야. 사실 절대 아닌데. 엄마가 글 쓴다고 청소도 잘 안 한다는 걸 모르겠지? 너희들이 공부도 안 하고 하루 종일 뒹굴거린다는 것도 모를 거야.
하지만 쉽게 사는 것과 대충 사는 건 많이 달라.
삶의 의미도 모른 체 바쁘게만 살아가는 걸 거부하는 건 쉽게 사는 거고, 집안 일도 대충, 일도 대충 하면서 책임지지 않는 건 대충 사는 일이고. 생명에 지장이 없고, 남에게 피해 주는 게 아니라면 좀 대충 해도 되긴 할 것 같다.
그런데 엄마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기니까 더 열심히 하고 싶어 지던걸?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땐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 그냥 하면 되는 거야. 실패할까 걱정하지 말고, 남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일단 하는 거, 그게 쉽게 사는 거 아닐까?
아빠도 아마 대충 사는 게 아니라, 아빠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어서 그런 걸 거야. 그런데 또 아빠는 우리 집 가장이니까 엄마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아빠에게 쉽게 사는 일이란 과연 뭘까? 정말 궁금하네. 아빠가 처음 쓴 글이니까 때지 말고 잘 둬봐.
그게 뭔지 찾으면 아빠가 때겠지.”
“응....”
우리 집 냉장고와 베란다엔 여전히 “그냥 쉽게 살자.”가 붙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