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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May 12. 2020

그녀의 취향

1일 1 소설

알람 소리가 들렸다. 단비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앉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다. 엉덩이를 들고일어나려다 다시 누워 버렸다.

‘아, 오늘 오프지. 한 시간만 더 자야지.’


남들이 모두 회사에 가서 열심히 일할 시간, 이불속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으니 꼭 백수가 된 기분이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다. 이미 정신은 맑아졌지만 일어나기가 너무 싫었다. 평일 낮에 만날 사람도, 연락을 할 만한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다들 병원일로 바쁘고 듀티가 다르다 보니, 약속 잡기도 힘들다.

신참 간호사 주제에 원하는 날짜에 오프를 신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룰이 어디 있냐고? 눈에 보이는 룰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규칙이 존재한다. 그걸 보지 못하는 자는 눈치도, 버릇도, 싸가지도 없는 간호사가 되고 만다. 다행히도 단비는 그런 규칙을 읽을 줄 알았다.


단비는 이미 맑아진 정신으로 자는 척하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했다.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단비의 엄마, 아빠는 아침 내내 고양이처럼 사뿐거렸다. 문도 살살 닫고, 밥도 숨죽여 먹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간호사가 되면 걱정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딸이 밤늦게까지 일하고 오거나, 밤을 새우고 오는 날이면 이상하게 딸에게 미안해졌다. 취직이 잘 된다는 말만 듣고 간호학과로 가라고 했던 자신들 때문에 딸이 고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족 중에 간호사가 없을 땐, 그 직업이 좋아 보이기만 하더니, 자신들의 딸이 간호사가 되니 모든 간호사가 안쓰럽게 보였다.



단비는 간단하게 외출 준비를 마쳤다. 병원이 아닌 곳에 갈 때는 좀 더 화려하게 화장을 하는 편이었다.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마스카라로 눈에 힘도 주었다. 집에 돌아와 다시 지울 테지만, 손톱에 붉은색 매니큐어도 발랐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는 철저하게 병원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혹여나 자기 몸에서 소독약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닌지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아보았다.



단비는 먼저 시내에 있는 대형 서점으로 갔다. 그곳엔 항상 사람이 많다. 책 읽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던데, 그 서점엔 온통 책과 사람뿐이다. 책과 사람 사이에 끼어 있으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녀는 신간 코너로 갔다. 매대에 진열된 책의 표지를 하나하나 만져 보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 책들 중, 몇 개나 살아남을까? 이 생각을 하니 책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지갑을 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신간 옆에 있는 베스트셀러 코너로 발길을 돌렸다. 한창 잘 나가는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책들은 위풍당당해 보였다. 단비의 눈길을 무시하고 있는 베스트셀러 앞을 느리게 지나쳐갔다.

‘내가 아니어도 사줄 사람 많으니까 뭐. 굳이 나까지 사지 않아도 되지?’

잘 나가는 책에 대한 단비의 감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애써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마음엔 질투심이 일었다.

그녀는 서점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국내소설 분야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낯선 작가들의 이름을 훑어본 후 책 세 권을 빼 들었다.

그녀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유명한 작가들의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보면서도 무명작가들의 책은 꼭 돈을 지불하고 사야 직성이 풀렸다.


그녀 역시 3년 전에 소설을 하나 썼다. 간호대학에 다닐 때였다. 친구들이 간호학 공부를 할 때, 그녀는 소설을 쓰느라 밤을 새웠다. 어느 작은 출판사를 만나 출간도 할 수 있었다. 처음 책을 출간했을 때는 온 세상이 자기편인 것 같았고, 못 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녀의 소설은 빛을 보지 못했다. 불꽃이 튀기는 사랑이 담긴 로맨스 소설 사이에서 호러 장르 소설은 외면당했다.


스티븐 킹의 미저리 같은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경험이 필요했다. 그녀는 일단 유명한 소설가가 아닌 유능한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간호가 국가고시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그녀가 분반실을 선택한 건 순전히 소설 때문이었다. 애 낳는 경험은커녕, 사랑에 대한 경험도 없었다. 영화와 책으로 배운 키스 때문에 대학 때 사귄 남자 친구와 처절하게 깨진 후론, 더욱 그랬다.

그녀는 산모들이 진짜 아파하는 모습, 소리 지르는 모습, 아기가 나오는 그 순간의 상황들을 쓰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자세히.


단비의 노트북에는 그녀와 함께 일하는 간호사들과 의사들, 산모들과 아기들에 대한 묘사가 써진 글이 가득 담겨있다. 특히 함께 일하는 경애 선생님은 보면 볼수록 특별한 게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다 아는 듯한 눈빛부터 그렇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의 손을 잡고 아기와 눈빛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단비는 경애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책 세 권의 값을 카드로 지불했다. 이 중엔 기대보다 재밌는 책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명인 이유가 이해되는 책도 있을 것이다. 단비의 책장엔 이런 책들이 쌓여 있다. 책을 가방에 넣고 유명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지나 맞은 편의 작은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대형 커피숍을 가지 않는 이유 역시 베스트셀러 책을 굳이 사지 않는 이유와 같았다.


커피숍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지만 맛있는 커피를 주는 곳도 있었고, 작기 때문에 맛이 별로인 커피숍도 있었다. 모든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연결시키지 않는 건 단비만의 성향이었다. 누구는 그걸 유난스럽지 않아서 좋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특별한 취향이 없는 거라 지적했다.

단비는 취향을 믿지 않았다. 단지 경험을 믿을 뿐이었다.


이번에 들어간 곳은 “달”이라는 커피숍이었다. 커피숍 이름처럼 카페엔 달 모양의 모빌과 달 그림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그게 너무 적나라해서 단비는 당황했다. 자신도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달고 축축한 것을 좋아해야 할 것만 같았다.


캐러멜 마끼아또를 시켜야 하나 고민하다 여느 때와 같이 아메리카노를 한잔 시키고 자리를 잡았다. 이제 느긋하게 새로 산 책을 읽으며 시간을 때워야겠다 생각했다. 직장인들이 퇴근할 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세 권의 책 중에 “밤의 진실”이라는 책을 펼쳐 보았다. 책의 표지가 어둡고 칙칙한 거 보니, 딱 자기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작가 이름도 역시 처음 들어 본 이름이었다.

“김지양? 여자야, 남자야. 필명인가?”


혼잣말을 하고 있을 때,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커피를 마시며 프롤로그 글을 읽기 시작했다. 카운터에선 그윽한 커피 향과 함께 콧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도 자길 간호사라고 짐작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그게 더욱 안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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