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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un 05. 2020

미술을 가장 싫어했던 사람이 그림을 그립니다.

행복일까? 아닐까?

초, 중, 고 학창 시절.  평균 점수를 깎아 먹는 과목은 바로 미술이었습니다. 이론도 실기도 형편없었죠. 물감 사용법도 이해하지 못했고, 데생하는 법도 몰랐습니다. 그냥 그 시간이 싫었어요. 그림을 너무 못 그렸거든요.  

여고시절, 운동장으로 나가 풍경화를 그려야 했습니다. 학교 건물과 그 옆으로 보이는 푸른 나무를 그렸습니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도 좀 그렸던 것 같네요.

다 그리고 난 후, 내가 봐도 이건 정말 아니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뭔가 공간이 많이 비어 보였고, 엉성했습니다. 나무는 아파 보였고, 학교 건물은 낡아 보였어요. 역시나,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때 전, 캐릭터 따라 그리는 건 곧잘 했어요. 연습장 표지의 캐릭터를 보고 따라 그리는 거였죠. 꽤 비슷하게 그렸거든요. 하지만 그건 미술이 아니었어요. 낙서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싫어하던 그림을 어느 날 갑자기 그리게 되었어요. 정말 어느 날 갑자기였습니다. 조금의 전조증상도 없었습니다.


남편과 다투고 방에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히며  앉아있었습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젠탱글이었어요. 선과 점을 반복적인 패턴으로 그리는 그림인데요, 우연히 어느 사이트에서 본 게 기억이 났습니다.

스케치북과 펜을 꺼내 엉성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게 제 첫 그림이었어요. 그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고민하던 것들을 잊을 수도 있었어요. 바로 몰입의 시간이었죠.  


플로우(몰입)라는 것은 사람들이 다른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을 정도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푹 빠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곧 이때의 경험 자체가 매우 즐겁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어지간한 고생도 감내하면서 그 행위를 하게 되는 상태이다.
- 미하이 칙센트-


그때 전 몰입의 기쁨을 알아버렸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 동안 글을 쓰느라 잠시 놓고 있긴 했지만, 언제든 돌아갈 수 있게 펜과 스케치북을 가까이에 두고 있었어요.

그리고 지난 달, 다시 그림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림도 글과 비슷해서 꾸준히 연습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하지만 잠시 한눈팔았다고 나무라지 않았죠.


그림도 글쓰기처럼 어디서 배운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기초가 없습니다. 이론도 없죠.

좋은 글을 쓰고 싶어 책을 보며 필사를 하듯, 다른 작가들의 그림을 보며 따라 그리고 있습니다. 내가 쓴 글로 책을 만들었듯, 언젠간 나만의 작품을 그릴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고 있어요.



학생 때 미술을 잘 못했다고 하면 다들 놀랍니다. 사실, 저도 놀라워요. 제가 이렇게 그림을 그리게 될 줄 몰랐거든요.


학교 다닐 때 배운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 미술 과목이었던 것 같아요. 영어를 오래 배웠지만, 성인이 되어 외국인을 만났을 때 한마디도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도 나는 디즈니로 출근합니다.”의 저자 김미란 작가님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디즈니 수석 캐릭터 아티스트인 그는 디즈니 제품의 모든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 캐릭터를 담당하고 있다고 해요.

신기한 것은 그분의 이력이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 국내 대학에서 생물학과를 졸업했대요. 하지만 애니메이션이 하고 싶어 무작정 LA로 갔다고 합니다.

그분의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만 저에게 있는 재능이라면 그들보다 더 많이 그리고서도 또 그릴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고통이나 힘겹게 억지로 그리는 게 아니라 즐거웠어요.”
“저의 삶에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지점들이 몇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한국에서 미술을 배우지 않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중략)….. 칼아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테크닉이 아니라 자기만의 확실한 색깔, 개성이거든요.”





저는 아이들에게 그림의 즐거움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그림은 힘들게 뭔가를 그리고 완성해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즐겁게 그림 그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어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말고,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따라 그린 그림 @핀터레스트



전 요즘도 다른 작가들의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기도 하고,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 보기도 합니다. 여전히 물감과는 친하지 않아서 색깔을 넣는 건 잘 못하겠어요. 그래서 그냥 나만의 느낌으로 공간을 채웁니다. 테크닉은 없지만, 나만의 색깔과 개성이 들어간 그림.



그림과 글쓰기는 단짝 친구인 것 같아요. 테크닉보다 중요한 노력과 꾸준함이 필요하죠. 자기만의 색깔이 중요하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그 시간이 정말 행복합니다.


글과 그림이 밀고 당기며 함께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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