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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ul 15. 2020

내 귀에 스피커

바람이 머물다간 자리에서

어렸을 적, 시골집 작은 방에는 1미터 정도 되는 커다란 괘종시계가 하나 있었다. 할아버지가 어딘가에서 선물 받은 시계였는지, 시계에는 “000 증”이라고 쓰여 있었다.

괘종시계의 윗부분은 시침과 분침이 시간에 맞춰 돌아가고 있었고, 중앙에는 태엽을 감을 수 있는 구멍이 하나 있었다. 아랫부분은 네모 길쭉하게 아래로 쭉 뻗어있었는데, 그게 꼭 시계의 다리 같았다.

거거에는 투명한 유리 문이 달려 있어서 진자운동을 하고 있는 커다란 시계 추를 볼 수 있었다. 그곳에 태엽을 감을 수 있는 열쇠를 넣어두었다.


내 키가 괘종시계의 키보다 더 커졌을 때 즈음부터 시계태엽을 감는 일은 내 몫이 되었다. 그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유리문을 열고 열쇠를 들어 시계 얼굴에 있는 구멍에 딱 맞게 넣고 시계방향으로 돌려주면 되었다.  지익, 지익 소리를 들으며 태엽을 감으면, 느려졌던 시계는 다시 속도를 내어 시간을 따라잡았다.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태엽을 감아야 했다. 매일 밤,

시계추가 움직이지 않게 멈춰 놓았기 때문이었다.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들리는 “째깍, 째깍”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시계는 내 할아버지가 나이 든 만큼 늙어갔는데, 시계 소리는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밤마다 시계 소리에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래서 밤마다 시계를 죽이고, 아침이면 다시 살려내는 일을 반복했다.

 


 요즘에도 한 번씩 새벽에 깨곤 한다. 그러면 어김없이 소리들이 들린다. 선풍기에 종이가 날리는 소리, 에어컨 실외기가 웅웅 거리는 소리, 어디에선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 남편 핸드폰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


한번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점점 소리가 커진다. 그리고 잠을 다시 자기가 힘들어진다. 펄럭이는 종이 위에 무거운 책을 올려놓는다. 에어컨을 잠시 끈다. 남편의 핸드폰을 끈다.

모든 소리를 종료시킨 후에야 다시 잠들 수 있다.

 


어린 시절, 그 괘종시계가 워낙에 시끄러웠다고 기억했다. 그런데, 사실은 내 귀에 스피커가 달려있었던 모양이다. 그 시계는 아무 잘못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자기 할 일을 했을 뿐.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내 문제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네가 서운하게 한 게 아니라,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다는 것을.

네가 나를 무시한 게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느라 내 말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네가 날 배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날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새벽 세시에 들리는 작은 소리들이

괜찮다고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소리들마저 모두 강제 종료시켰다.

가끔은 그 괜찮다는 소리마저 너무 시끄러워, 괜찮지가 않다. 

조용히 해주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내 귀에는 스피커가 달려있다.

아니, 

 마음에 달려있는지도 모르겠다  


by goodness : 가끔 연필 소리도 엄청 크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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