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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Sep 19. 2020

포기는 실패가 아니라 선택

선을 긋다, 마음을 잇다.

뭄바이에 살던 시절, 내 아이와 같은 반 친구, 뱁티스트의 엄마는 흑인이지만 정말 예쁘게 생겼었다. 키도 크고, 몸매는 글래머러스했으며 이목구비도 뚜렷해 누가 봐도 미인형이었다. 성격도 어찌나 좋은지, 학교 안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와 한번 대화를 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아는 사람은 또 어찌나 많은지, 한국 사람, 일본 사람, 인도 사람, 프랑스 사람, 미국 사람. 뭄바이에 사는 외국인은 다 알고 있는 듯했고, 심지어 나에게 한국 사람을 소개해주기까지 했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특별한 주문을 하나 했다. 바로 자신의 얼굴을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그린 그림들을 페이스북에 올린 것을 본 모양이었다. 그리곤 콕 집어 이렇게 그려달라고 주문을 했다.


얼굴 그림….

사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긴 했지만, 가장 자신 없는 분야가 바로 사람이었고 그중에서도 얼굴이었다. 난 사람 얼굴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바로 내 아이들을 그리는 일이었다. 그건 아마도 모든 엄마들의 로망일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그림으로 똭 그려서 액자에 똭 넣어두는 로망.

하지만 그 로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사진을 보고 그려도, 실물을 보고 그려도 그림으로 아이들의 얼굴을 표현할 수 없었다. 사물이나 풍경은 눈에 보이는데로 그려도, 조금 선이 길어지거나 짧아져도 크게 티 나지 않았다. 선이 하나 더 겹쳐도, 덜 겹쳐도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다. 사진을 보며 사이즈를 재서 그려도 그림은 이상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



“얼굴은 황금비율이 있어요. 보이는 데로 그리면 이상한 얼굴이 되어버려요. 비율에 맞춰서 그려야 해요.””

사람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비율에 맞게 그려야 한다고 했다. 타원형의 계란을 하나 그리고 십자가를 그려준 뒤 삼등분을 하고, 이마의 위치를 잡고, 턱의 위치를 잡는다. 눈과 코와 입의 위치를 다시 잡고, 미간을 잡고, 눈썹의 위치를 잡고 입꼬리의 위치까지….

그림을 그리려면 수학을 잘해야 하나? 아무리 연습하고 연습해도 내 스케치북엔 연필 자국과 지우개똥만 쌓여갔다. 하지만 친구의 부탁은 꼭 들어주고 싶어서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렸다. 이렇게 그려보고 저렇게 그려보고, 아무리 그리고 또 그려도 그녀와 닮지 않아 보였다. 결국, 그중에 가장 닮은 그림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 후로도 얼굴 그림을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매번 실패하고 말았다. 황금 비율에 맞춰 그려도, 달걀을 그린 후 간격에 맞춰 그려도 인물 그림 실력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인물화는 못 그리는 사람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 내 인생이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내 아이들이지만, 마음처럼 자라지 않는 것도 매 한 가지이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불도저처럼 그냥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할까? 포기를 모르는 유명한 인물들처럼 성공할 때까지 해봐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럴 때 깔끔하게 포기를 한다. 더 이상 못하겠다고 선언한다.

그 대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더 해본다. 그래서 여전히 사람 얼굴을 잘 못 그린다. 대신 풍경 그림 실력은 많이 늘었다.


해도 해도 안된다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도시의 생활을 포기하고 귀농을 선택한 것, 한국의 생활을 포기하고 해외 생활을 선택한 것, 공부를 포기하고 기술을 선택한 것, 결혼을 포기하고 싱글을 선택한 것. 포기는 실패가 아니라 또 하나의 선택이다.



얼마 전에 산 태블릿으로 라인 드로잉을 시도해 보았다. 연필을 들고 종이에 사람을 그릴 때는 그려지지 않더니, 사진을 아래 놓고 라인을 따라 그리니 그럴듯하게 그려지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다. 그럴 땐 다른 방향의 문을 열어보자.

그게 다른 사람의 눈엔 포기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에겐 또 다른 선택일 뿐이다.  


들꽃 ©️선량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들꽃은 이곳을 선택한 것이지 실패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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