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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an 16. 2021

2. 둘, 커피

마흔, 둘의 단어



열한 살이 된 아이에게 드립 커피 내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커피 필터에 적당량의 커피를 올리고 뜨거운 물을 세 번에 나누어 천천히 부어 커피를 내리는 과정을 알려주었다. 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아이에게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했다. 아이는 따뜻한 커피를 한 사발 내려 가져왔다.

아이가 처음으로 내려준 커피를 마시며 십 대가 된 아이를 음미했다.


아이에게 커피 타는 법을 가르친 건 아이가 열 살 되던 때였다.

믹스커피 봉지 끝, 점선 부위를 잘라내는 법, 물을 뜨겁게 끓인 후 머그컵 1/3까지 부어 컵을 먼저 덥히고 믹스커피를 휘리릭 넣어 휘휘 젓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 후 믹스커피 담당은 아이 차지가 되었다.


커피 타는 오빠가 부러웠는지 여덟 살 딸아이가 제발 커피를 타게 해 달라 애원했다. 인심 쓰듯 이번엔 네 차례래야. 한번 타봐.라고 말했다.

딸아이는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고 예쁜 컵을 고르고 커피믹스 봉지 끝을 가위로 자르고, 컵받침까지 준비해 커피를 내왔다.

그런데 커피 물은 머그컵 가득이었고, 커피 가루는 주방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나는 허허허 웃으며 커피 한 봉지를 더 넣어 휘휘 저었다.



성에 호기심을 보이던 아이가 끊임없이 질문하던 때가 있었다. 나중에 알려줄게, 좀 더 크면 알려줄게… 계속 아이의 호기심을 지연시키다가 십 대가 되었을 때, 날 잡고 성교육을 시켰다.

여자와 남자의 다른 점,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 그리고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과 조심해야 할 점들을 설명했다.

내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호기심은 더 넓고 깊어진 것만 같았다. 결정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 자세히 설명하고 싶었지만, 이미 웃고 떠들고 있는 두 아이에게 설명이 먹힐지 자신이 없어 그만두고 말았다. 아이들은 어디까지 이해했을까?



열 살과 열한 살은 또 달라서 일 년 만에 아이의 신체가 쑤욱 자랐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어린아이 같기만 하다.

내 앞에선 아이 같지만, 다른 장소와 공간에서는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직 엄마의 사랑이 전부인 아이에게 남녀의 사랑을 가르치기가 어렵다. 같은 반 여자아이의 관심에 수줍게 웃기만 하고,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의 키스 장면이 나오면 눈을 가리고 까악~ 소리를 지른다. 좋아하는 여자아이 없느냐 물어봐도 매번 없다고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너도 스킨십을 하게 될 것이고 키스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아이는 아이러니한 표정을 지으며 노노~를 외쳤다.


키가 자라듯 사랑의 감정도 함께 자라겠지. 그리고 엄마도 모르는 경험을 하게 되겠지.  




커피의 맛을 모르던 아이가 믹스커피의 달달한 맛을 알아버렸다. 커피 섞던 작은 숟가락을 자기 입속으로 쏙 넣더니, 맛있다며 방긋 웃는다. 넌 아직 어려서 커피 마시면 안 된다는 고리타분한 말을 했다. 좀 더 그럴싸한 변명을 했어야 했는데, 아쉽다.


어려서 아직은 안된다는 말보다 근사한 말이 없을까? 이런저런 단어를 생각해 보았지만,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가장 고리타분한 말이 가장 그럴싸한 말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아이가 타 준 커피를 마시며 아이의 성장을 생각했다. 이 아이가 커피 두 잔을 타서 엄마와 함께 커피를 홀짝이는 날엔,

아이의 성에 대한 호기심도 없어지겠지.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사랑을 하고 어떻게 아이를 갖고 어떻게 부모가 되는지도 알게 되겠지.


달달한 믹스커피 말고 쓰디쓴 아메리카노의 맛을 알게 되면,

세상의 고달픔과 쓰고 달콤한 인간관계의 맛도 알게 되려나?


아직 어려서 안 된다는 이 말은 지금이니까 가능한 추억의 말이 될 것이다.


 말은 이제 겨우 마흔둘인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생에서 지금이 가장 어린 나이니까. 



어느 쪽이든  야망은 과거의 것이다. 
미래는 이제 인생의 목표를 향해 놓인 
사다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되는 현재가 되어버렸다.

-숨결이 바람   /  칼라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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