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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Feb 07. 2019

[12년 전, 네팔#1] 그곳에 내가 있었네

극한의 경험은 지금을 살아가게 하는 씨앗이 되어준다.

2006년 여름, 5년 동안 다니던 병원을 그만두었다.


그 도시에서 나름 이름 있는 종합병원이었다. 병원에 다니면서 좋은 기억도 참 많았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5년 차였던 난 카리스마도 좀 있었고, 주사도 꽤 잘 놨고, 후배들이 좋아해 주는....... 그래도 나름 잘 나가던 간호사였다.  
3,5,7,9.... 홀수로 찾아온다는 슬럼프를 이기지 못하고 사표를 내고야 말았다.
막내딸이 큰 병원 다닌다며 좋아하셨던 부모님의 기대도 나의 결정을 막지 못했다.


몇 달 뒤, 네팔로 향했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던 내가, 비행기도 처음 타보는 내가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그저 히말라야의 설산에 홀려 걷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카트만두였다.



네팔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난 무작정 떠났다. 그냥 떠나고 싶었다. 아무도 날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서른이 넘으면 용기도 무모함도 더 이상 나에게 허락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28이 되던 겨울, 나에게 남아있던 용기와 무모함을 끌어모아 네팔행 비행기에 몸을 싫었다.



20대는 겁이 없다.


네팔 카트만두의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걸어 다니고, 현지 버스도 타고 다니고, 툭툭이도 타고 다녔다.
현지 축제가 있을 때면 먹을거리를 싸들고 친구와 함께 현지인들이 가득한 곳 어디쯤에 자리 잡고 앉아 함께 축제를 즐겼다.


내가 일하던(해외봉사단으로 현지 병원에서 일을 했다.) 곳에서 만난 환자의 안부가 궁금해 로컬 버스를 타고 두 시간을 달려가 그녀의 집에서 짜파게티를 끓여줬다. 그녀는 날 기억하고 있을까?


친한 직원의 시골집에 놀러 가 나뭇잎에 올려진 밧과 떨까리(네팔식 밥과 채소 요리)를 손으로 집어 먹고, 길을 걷다 길가에서 파는 찌아( 네팔식 짜이)를 마시곤 했다.


내가 일했던 곳은 벅터풀 질라 병원인데 카트만두에서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나오는 도시이다. 벅터풀은 옛날식 건축물과 가옥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일이 끝나면 벅터풀에 살고 있는 친구 집에 놀러 가 함께 수다를 떨고 찌아를 마셨다.

지난 대지진 때 여기저기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해 매우 안타까웠다.

나의 마지막 20대를 온전히 불사르며 네팔에서 보낼 수 있었다.  자유를 만끽하고,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며 살았다.

혼자 사는 작은 집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온몸으로 춤을 추기도 하고, 정전된 방 안에서 촛불을 켜 놓고 일기를 썼다.



네팔에서 한 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EBC 트레킹이다.


10월이 되면 긴 더사인이라는 축제가 있다. 그때 외국인들은 에베레스트나 안나푸르나로 트레킹을 떠난다.  난 친구들과 함께 EBC 트레킹을 갔다.


푸른 설산 아래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은 존재였다.


광활한 자연 앞에서 우리는 티끌 같은 존재였다.


해발 5000m에서는 조금만 걸어도 숨이 탁탁 막히고,  숨쉬기가 힘들어지는 경험을 했다. 밤에 잠을 자다가 몸을 뒤척이면 숨이 가빠지는 경험도 해보았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극한 경험은 내가 살아가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겨낼 수 있는
씨앗이 되어준다.


첫 아이를 낳을 때,
3.9kg의 남자아이를,  무통주사도 없이 밤을 꼴딱 새우며 진통을 하고 낳았다. 그때 난 한없이 생각했다.
“내가 ebc도 다녀왔는데.... 이것도 못 참을까....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방글라데시에서 힘들 때도 이때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겁이 없던, 나의 마지막 20대를 보냈던 곳, 네팔.......

그곳은 항상 아련하고, 그리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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