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애락애오욕 중에 '애'
저녁을 거나하게 먹은 후, 다이어트 실패에 대한 자괴감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한 포만감이 한대 엉켜 데굴데굴 구른다. 눈덩이처럼 커진 자포감(자괴감 + 포만감 = 자기포기감)은 안 그래도 축 쳐진 두 눈 위로 슬금슬금 올라가 지긋이 눈꺼풀을 짓누른다. 분명 나는 책을 읽고 있는데, 무의식 저 너머에서는 무거운 돌덩이가 된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시시포스가 되었다. 결국 신에게 지고만 한 인간의 몸부림은 꾸벅꾸벅 조는 것으로 처참하게 남겨졌다.
"내 이상형을 이제야 깨달았어."
옆에서 유튜브를 보고 있던 그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뜬금없는 이상형 타령 때문이었나, 남사스럽게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나.
나를 짓누르던 돌덩이를 번쩍 들어 올려 저 멀리 날려버렸다. 순간 잠이 확 깼다.
"뜬금없이 뭔 소리야?"
"이제야 내 진짜 이상형이 뭔지 알았다니까."
"결혼한 지 12년이나 지났는데, 그걸 이제야 알면 어떻게 해? 자기 첫사랑 그 누나 말하는 거야? 아니면 군대 제대 후 사귀었다는 고딩 교회 동생?"
"뭔 소리야. 생각도 안 나는 사람들을 왜 꺼내고 난리야."
"아, 한 명 더 있네. 그.. 이름이 뭐더라... 걔는 잘 지내나.... 결혼은 했나...."
나는 내 남편의 과거를 모두 알고 있다. (그는 내 과거를 다 알지 못한다.)
싸이월드가 다시 열렸을 때 서로의 싸이월드 사진첩에 들어가 "이 사람이야? 아니면 이 사람?" 하며 집요하게 찾아다녔지만, 나도 그렇고 그도 그렇고 언제 다 과거를 지워버렸는지. 한 장도 찾지 못했다. 내가 이렇게 철두철미한 사람이 아닌데.... (사실 조금 아쉬웠다.)
우리는 20년 전의 자기 사진을 쳐다보며,
"와, 나 진짜 예뻤네. 반짝반짝 빛나네."
"근데 표정이 왜 이리 우울해 보여?"
"힘들었나 보지."
"이 남자는 누구야?"
"교회 동생이야!!"
"교회 동생들하고 친했나 봐."
"친했지!!"
"와, 나 스타일 좋네. 이런 옷이 어울렸다니."
"이 노란 셔츠에 넥타이는 뭐야? 택시기사야?"
"이런 옷이 어울렸다는 게 포인트야."
"이 분홍셔츠는 뭐야? 꽃제비였어?"
"아, 뭔 소리야. 스타일 좋기로 유명했는데."
"어우, 부담스럽구로~"
그때의 우리는 사는 지역도, 학교도, 나이도 달랐다.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시절이었다.
스무 살에 우리가 만났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이상형이었을까???
"그래서 당신의 이상형이 뭔데?"
"워킹맘, 일하는 여자."
그가 갑자기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2주 전부터 그의 사무실로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근로자에 대한 권리와 복지가 좋은 것을 넘어 너무 과하다 보니, 새로운 직원을 뽑는 것이 쉽지 않다. 정직원이 될 경우 월급의 23%~43%까지 세금이 부과되고, 매우 복잡한 절차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회사에 소속되는 정직원 보다도 계약직이나 회사와 개인 사이에 계약을 맺는 Agent 개념이 더 활성화되어있다.
나는 새 직원을 뽑을 때까지 바쁜 일을 도와주는, '쩜오' 개념의 인력이 되었다. 남편이 출근할 때 함께 출근해서 회사 직원이 가르쳐주는 일을 처리하고, 컴퓨터에 입력하고, 영수증을 붙이고, 창고에서 제품 정리를 하고... 등등의 일을 한다.
그리고 아이들 끝날 시간이 되면 1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향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와서 집 정리를 하고, 저녁을 준비하면 어느새 어두운 밤이 된다.
12년 전에 큰아이를 낳으며 회사를 그만두었는데, 마흔이 넘은 나이에 다시 출근이라는 걸 한다.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는 것이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비록 쩜오의 일일 지라도....
그래서 매일 저녁 시시포스가 되어 돌덩어리가 된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신과 한판승부를 겨룬다. 매일 신에게 진 나는 눈을 감고 9시도 되기 전에 침대에 눕는다. 읽다 만 책은 쌓여있고, 쓰다 만 글도 역시나 쌓여있다.
어깨를 주물러주는 그를 향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10년 동안 전업주부로 있었던 나는 당신의 이상형이 아니었나 봐."
그날 저녁, 아이들에게 고자질을 했다.
"얘들아 아빠의 이상형이 일하는 여자래. 워킹맘 이래."
"아빠 이상형은 단발머리 아니었어?"
"단발머리? 누구?"
"아빠 지갑에서 봤는데. 단발머리 여자."
"그래???"
퇴근해서 돌아온 그의 지갑을 몰래 열어보았다.
거기엔 정말로 단발머리의 여자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15년 전의 나였다.
본 매거진 ‘다섯 욕망 일곱 감정 여섯 마음’은 초고클럽 멤버들과 함께 쓰는 공동 매거진입니다. 여섯 멤버들의 ’희노애락애오욕‘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