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로애락애오욕 중에 욕
올해 마흔넷이 되었다.
여전히 마음과 정신은 어린 시절 그대로인 것 같은데 시간이 알려주는 내 나이는 어느새 중년이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림이 없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알며, 적당한 자극과 편안한 권태를 즐기며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같고, 무엇을 원하는지 여전히 모르겠으며, 자극은 피하고 싶고, 권태가 올까 두렵다.
공자 왈, 마흔은 불혹의 나이이고 쉰은 지천명의
나이라는데, 공자님이 살던 시절엔 평균 수명이 짧았을 테니 당시의 마흔은 지금의 예순이고, 당시의 쉰은 지금의 칠순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부터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고 있다. 첫째 아이를 낳은 후 전업주부가 되었으니 거의 12년 만에 출근이라는 걸 하고 있다.
그런데 집에 편안히 앉아 글을 쓸 때는 알아채지 못했던 거북한 몸뚱이를 절실히 실감한다. 급격히 찐 살을 관망하다 늘어진 뱃살을 아무리 구겨 넣어도 숨길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의 낭패감이란…
청바지를 입어도, 원피스를 입어도 성에 차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쉰다….. 하….
“중력을 이기고 몸을 일으켜 운동을 하는 것은 건강과 아름다움을 가져다준다.”
청담동 몸짱 아줌마가 했던 말이라고 한다.
어쩜 세상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은지. 같은 사십대지만 화면 속 그녀들은 뱃살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근이 선명하다.
부럽다.
그녀들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중력을 이기고 몸을 일으켰을까?
나는 날씬해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다만 아름다워지고 싶다.
”아름답다 “는 말은 예쁘다와는 다르다. 꽃송이가 예쁘다면 꽃을 이루는 뿌리, 줄기, 이파리, 꽃 봉오리, 암술, 수술은 아름답다.
엉덩이를 실룩이며 춤을 추다 갑자기 민망해져 엄마 품에 안기는 아이는 예쁘고, 그런 아이를 바라모며 주름졌지만 온화한 할머니의 모습은 아름답다.
중년의 나이에 예뻐지기 위한 노력과 아름다워지기 위한 노력은 분명 다르다.
예뻐지기 위해서는 얼굴에 레이저를 맞거나 보톡스 주사를 맞거나 리프팅 시술을 받을 것이다.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일상 틈틈이 노력이 필요하다. 외형의 아름다움을 위해 운동과 식단조절을 해야 하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위해 독서와 공부가 필요하다. 거기에 겸손과 덕을 갖추려면 삶에 대한 태도까지도 매번 돌아보아야 한다.
김창옥 강사님의 말에 의하면 나이에 따라 칭찬의
내용이 달라진다고 한다.
20대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참 똑똑하다”는 말이 가장 좋은 칭찬인 반면, 중년에게 “참, 똑똑하더라고”는 욕이 된다고. 대신, ”참 아름답다 “ 또는 ”덕이 참 많다 “라는 말이 가장 좋은 칭찬이라고 한다.
아름다워지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오던 어느 날, 가족들에게 저녁을 차려주고 나는 밖으로 나갔다. 삼겹살과 김치와 파절이의 유혹을 이겨냈다.
공원을 걷고 뛰며 오롯이 내 숨에 집중했다. 떨어진 체력으로 오래 뛰지 못하고 금방 숨이 찼지만 괜찮다. 아래로 잡아끄는 중력을 이겨내고 있다는 증거다.
삶에 대한 좀 더 깊은 시유를 위해 고전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분명 시대는 많이 달라졌지만, 고전 소설이 주는 메시지와 깊이는 요즘 소설과 많이 다르다. 나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와 사상, 인물과 감정을 읽으며 마음의 중력을 이겨낸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 사랑받고 싶은 욕구, 칭찬받고 싶은 욕구.
지금껏 내 삶을 이끌었던 “타인에 의해 받고 싶은 욕구“를 잠시 내려둔다.
그리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내 본연의 욕망”을 꺼내 스스럼없이 충족시켜 보겠다.
부디,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뿐만 아니라 아름다워질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