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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ul 12. 2023

3. 타인의 삶이 부러울 때

아주 작은 성취를 경험하기


한창 인스타그램에서 열심히 활동할 때 친해진 인친이 있었다. 직업도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매번 예쁘게 음식을 차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렸다. 게다가 얼굴도 예뻤다. 글솜씨도 남달랐다. 한 번씩 라방을 하면 들어와서 글쓰기에 대해 질문도 하고, 응원도 해주시던, sns에서 만난 사이였지만 꽤 친해진 경우였다.

나는 그녀가 요리한 음식을 직접 그려 선물하기도 하고, 글을 유니크하게 쓰시니  긴 글을 써보시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그녀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전 직장 동료의 인스타그램에서 그녀의 모습을 본 것이다.

나는 아는 체를 했다.

“어머, 하영 님이 여기 계시네요? 선생님도 아는 분이세요?”

내 댓글에 선생님은 다른 말을  했다.

“이 사람 이름은 ‘ooo’에요. 푸드 스타일리스트인데 꽤 유명해요.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어요. 글은 전혀 안 쓰시는 것 같은데…. 아무튼 엄청 부자에 잘 나가는 사람이에요. “


나는 비공계 계정인 내 인친의 피드와 공개 계정인 유명인의 피드를 번갈아가며 확인해 보았다.

같은 사진 아래엔 전혀 다른 내용의 글이 적혀있었다.


갑자기 허탈함이 밀려왔다.

지금까지 나와 소통한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무엇 때문에 타인의 삶을 훔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싶어 메시지를 보냈지만, 어느새 눈치채고 나를 차단해 버렸다. sns에서 만난 그녀와 나의 연결고리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꽤 오랫동안 내성적인 사람으로 살았다.

어렸을 적엔 사람들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고, 학창 시절엔 하루 중 몇 마디 하지 않고 지내기도 했다.

스스로 발표하겠다고 자발적으로 손을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사람들 앞에 서서 말을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 바로 위에 언니는 나와 정반대였다. 어디서나 적극적이었고,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 거침없이 말을 했고, 인기도 많았다.

나는 그런 언니가 참 부러웠다. 내성적, 소극적이라는 어휘는 마치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처럼 부정적으로만 느껴졌다.



어른이 된 후엔 이런 내성적인 모습이 조금씩 사라졌지만, 여전히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은 없었다.  내가 주로 쓴 문장 역시 대부분 수동태였다.

“남편이 해외취업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도 살게 되었다.”

“결혼하자마자 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전업주부가 되었다.”

“갑자기 낯선 나라, 인도에 살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


삶 앞에서 수동적이던 나는 자기 연민에 빠졌다. 나의 이 슬픔을 알아주지 않는 남편이 미웠다.  그리고 능동적인 남들의 삶이 부러웠다.


이랬던 내가 지금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건 것은

'내게 주어진 한정된 삶 앞에서조차 소극적으로 대하면 내 삶은 더더욱 수동적으로 흘러갈 것 같았고, 여전히 자기 연민의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삶을 비관하며 흘려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중심엔 역시나 “책과 글”이 있었다.

나는 책을 읽게 되고, 글을 쓰게 된 것이 아니라,

나는 책을 읽었고, 글을 썼다.





“자네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야.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나 가지고 있으니 말일세. 말도 있고 개도 있고 사냥도 할 수 있거니와 농장도 있으니 말이야.”


“아마 그것은 내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아등바등하지 않기 때문일 걸세.”
- <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는 여러 인물이 대조적으로 나온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조적인 사람이 바로, 브론스키와 레빈이다.

군인 출신의 잘생기고 사교적인 브론스키는 기차역에서 안나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안나에게 남편과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훔친다. 안나가 자기 사람이 아니었을 때는 그 사랑이 너무 뜨거워 적극적으로 사랑을 갈망하며 쟁취한다.

하지만 안나와 함께 살게 된 후에는 혼자 자유롭게 살았던 때를 그리워한다. 안나 때문에 자신의 삶이 힘겨워졌다며 후회를 한다.


반면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소소하게 살아가는 레빈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 키티가 브론스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 이후, 미련을 버리고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남들은 그런 레빈에게 화려한 사교계를 떠나 허름한 시골에서 재미없게 어찌 사느냐고 하지만, 레빈은 자신의 소소한 삶에 만족을 느낀다. 곡물을 수확하고, 가축을 기르고, 사냥을 나가는 등의 일은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레빈에겐 작은 성취였다.




지금 밀라노에 살고 있다고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같은 대답을 한다.

“정말 멋지네요. 부러워요.”

하지만 그전엔 인도와 방글라데시에 살았었다고 하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정말 힘들었겠어요.”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던 곳은 바로 인도였다. 갑자기 낯선 나라 인도에 살기 시작했을 때, 어떻게든 내 삶을 수동적으로 흘러가게  두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꼭지를 쓸 수 있었던 것에 성취감을 느꼈다. 그다음엔 10페이지를 넘겼다는 것에, 그다음엔 50페이지가 넘게 글을 썼다는 게 뿌듯했다.

원고를 투고할 만큼의 원고를 썼다는 사실이 기뻤고, 브런치 작가에 합격했다는 것이 큰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그런 소소한 성취감들이 나를 계속 쓰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소소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 따라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바뀐다.

마치 화려한 도시 남자 브론스키를 다들 우러러보고, 시골 남자 레빈을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결말은 확연히 다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삶을 훔치며 살던 브론스키와 안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시골로 내려가 살지만, 여전히 힘겨워하고 결국 안나는 기찻길에 몸을 던진다.

반면 레빈은 브로스키에게 버림받은 키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결혼해 시골의 삶을 풍성하게 가꾸어나간다.


우리가 사는 곳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환경을 비관하며 타인의 삶을 부러워만 한다면 내 진정한 삶을 꾸려나가기 힘들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계발서에 ‘자기 이야기가 빠진, “계발”에 관한  이야기만 있다면 아무도 그 책을 사지 않을 것이다. 모든 곳에 필요한 것은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이다.


가끔 다른 사람의 삶을 살고 있던 인친이 떠오른다.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타인의 가면을 벗고

자신의 얼굴로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다시 나를 팔로잉하더라도 또 다른 모습과 이름으로 다가온다면, 나는 그 사람이 그녀였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타인의 삶이 부러울 때 이렇게 해보세요.]
1. 잠시 sns를 멈추고 내 진짜 삶에 집중하기 
2.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하며 성취감을 느껴보기 
3. 부러운 사람의 삶을 관망하지 말고, 부러운 사람들의 모임에 한발 들여놓기 
4. 혼자서 성취를 경험하기 힘들 때 타인의 성취에 기대어 함께 해보기 
5. 지금 내 삶이 힘들다면, 그때가 바로 글을 쓰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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