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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Jan 10. 2021

언니, 그동안 없이 살았냐

이 시국에 퇴사 일기, 그 첫 번째

이 ‘코시국’에 퇴사를 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대기업에 입사하게 된 동생에게 한 마디 들었다. “언니, 이때까지 없이 살았냐”. 가족끼리 오랜만에 집 근처의 대개 시장에서 게 몇 마리를 사며 저녁을 함께 먹었던 때였다. 게가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 가족이 더 먹었으면 좋겠는 마음에 대게 대신 튀김 껍질과 족발 살점을 밥과 함께 먹고 있었다. 아빠는 “게도 좀 먹어라”라고 말하며 내 수저의 움직임을 주시했고 옆에 있던 동생은 나에게 그런 말을 던진 것이었다.


그 순간 참 여러 장면들이 떠올랐다. 25살에 전 남자 친구와 갔던 대게 집에서 패기롭게 “내가 사겠다”라고 말한 뒤 홍게를 시켰고 얼마 되지 않는 양에 눈치만 보며 “혹시 배가 덜 부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내가 다리 하나를 덜 집고, 반찬 하나를 덜 먹으며 그에게 “난 이제 배불러”라고 말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말없이 그가 먹는 모습만 바라봤고, 모자란 양임을 앎에도 맛있게 먹어주는 그가 참 고마웠다.


집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먹을 때도, “내가 더 먹어야지”라는 생각보다 내가 덜 먹고 상대가 이 정도에도 충분히 만족해줬으면 하는 마음에 숟가락을 내려놓고 배부른 척을 했다. 아마, 그는 몰랐을 것이다. 이후에 시작한 연애에서도 좋은 걸 먹을 땐 늘 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것으로 배를 채우며 한껏 배부른 척을 했다. 적으면서 생각하니, 조금 서럽기도 하다.


서울에서 약 1년 3개월 간 200만 원이 채 되지 않는 돈을 받으며, 50만 원이 넘는 월세와 식비 그리고 생활비로 살아왔던 나는 어쩐지 “없이 살았냐”이 제일 듣기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25살, 상경하기 전 나는 고향에서는 비교적 넉넉하게 취준 생활을 했고 막연히 올라온 서울에서는 돈 때문에 전 남자 친구와 싸울 정도로 굉장히 힘들었다.


잔고에 있는 5만 원으로 5만 원어치 고기를 사야 할 때의 그 조마조마함과 교통비가 빠져나가는 25일 날 남은 잔고를 아슬아슬하게 바라봤던 때. 신발을 선물하고 싶어 바보같이 적금을 깼고, 취직 이후 여행을 갔을 땐 비싼 밥은 내가 사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패기로움에 월급날을 10일을 남겨놓고 통장에 잔고가 없기도 했다. 돈에 대한 관리도 부족했고, 씀씀이가 급여에 못 미쳤었지만 이러한 생활들이 나에게 남긴 건 돈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돈을 쓸 때마다 잔고를 외면하며 지내고 큰 결심에 돈이 필요하다면 그 결심을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후회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 돈을 씀으로 인해, 각박해질 나의 삶이 걱정이 되었다. 또 마냥 나와 함께 졸업한 동기들이 전공을 살려 돈을 모으고 있다는 주변 상황에 대한 열등감이 아니었다. 빡빡하게 사는 생활만큼 내 마음도 그만큼 좁아졌으며, 돈이 많으면 좋은 사람 되기 쉽다는 한 드라마 대사의 이야기처럼 주변 사람들을 자주 챙기지 못하고 만남을 갖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난 퇴사까지 했고, 대기업에 취직한 동생에게 “없이 살았냐”라는 말을 들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이때까지의 서울살이가 떠오르며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대게를 먹지 않았던 것은 먹고 싶지가 않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아왔던 내 서울살이의 습관들이 배어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퇴사를 앞둔 12월의 마지막 날, 회사의 아이맥 속에 담긴 사진들과 다운로드 항목들, 각종 자료들을 모두 삭제하고 검색 기록을 없앴는데 기분이 묘했다. 다시는 이 곳을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말이며, 그곳에 쌓인 각종 명함들을 버린 것은 이 분야로 절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무언의 항의였다. 퇴사를 결심한 건, 큰 이유도 아니었으며 단지 집으로 가는 7호선에서 든 결심이었다. “아, 지금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재직한 지 1년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누구에겐 짧기도 길기도 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더는 여기서 성장할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몸과 정신이 지쳐갔고 눈덩이 같이 불어나는 직업에 대한 회의감에 견딜 수가 없었다. 각종 매체에서 퇴사, 이직 이야기를 보게 되면 나의 상황에 모두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럴 수밖에 없고, 어쩌면 그들이 말하는 것들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이직이 되지 않는다면 어쩌면 지금보다 수 십배는 더 속 좁은 사람이 될지도, 아니면 지나치게 남들의 눈치를 보며 내 몫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없이 살았던 나를 응원한다. 나 마저 나 자신을 불쌍히 여긴다면 그만큼 슬픈 일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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