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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Jan 13. 2021

초록색 맨투맨을 입고 면접을 보다

이 시국에 퇴사 일기, 그 두 번째

지금 내리는 결정이 맞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 사람들은 보통 과거의 상황들을 떠올려보는 것 같다.


과연 내가 마음을 먹어서, 뜻대로 된 결과들이 있었나. 있었던 경험이 많았다면, 내 결정을 믿고 나아가는 힘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고 실패하고 후회했던 경험들이 많았다면 어떤 선택에 주저하는 일이 잦아질지도 모른다.


퇴사를 하고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내 결정이 앞으로 옳을 것인가”에 대한 답을 과거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27년 간 살아왔던 인생의 중요한 지점마다 날 선택이라는 시험대에 올려놓은 순간들을 회고했다.


때는 스물두 살, 건축학과 공부가 하기 싫어 다짜고짜 상경해 국문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편입 공부를 시작했다. 허위 매물이라는 개념도 제대로 모른 채, 한 앱으로 만난 부동산 중개업자가 소개해주는 대방동 원룸 곳곳을 누볐다. 마지막으로 본 반지하 방은 40만 원대에 가장 저렴했고, 안도 깨끗해 살만할 것 같았다.


햇빛은커녕 철장 너머로 자동차 바퀴들이 즐비했고, 친한 언니를 집으로 초대한 날 동네 아이들의 장난에 철장 틈으로 물총의 물을 맞기도 했다. 그 물은 고스란히 침대에 누워있는 나와 언니의 머리로 향했다.


그렇게 시작한 서울 생활은 단조로웠지만 사무치게 외로웠다. 모든 수험 생활이 그렇듯 ‘합격’, ‘불합격’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힘, 그렇게 밀고 나가는 독기를 갖기 힘든 게 보통사람들이지 않을까.


아침 6시면 노량진으로 향했고 오후 10시가 되면 컵밥을 사들고 집에 갔다. “17살에 고등학교 선생님이 보여준 노량진 다큐멘터리 속의 사람들이 내가 되다니”, “내가 이 컵밥 거리를 검은색 삼선 슬리퍼를 신고 걷다니” 등 따위의 생각은 잠깐이었으며, “이 사람의 점수 상승 비법은 무엇인지”, “어떤 선생님이 좋고, 누가 에이스인지” 등 오로지 공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매월 치는 평가 상위권에 내 이름이 들어가면, 근처 24시간 독서실에서 새벽에 몰래 학원으로 와 굵직한 볼드체로 적힌 ‘김X현’이라는 글자를 만지작 거리다 집에 갔고, 학원 가는 시간을 아끼려 독서실 바닥에서 담요를 깔고 자기도 했다.


긴 수험생활 끝에 각 대학에서 원서접수가 시작됐고, 나는 서울에 위치한 주요 대학들에 모두 ‘국문학과’로 지원했다. 그중, 1차에 지원했던 상위 대학에 모두 붙으며, 좋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문제는 2차인 면접이었다. 한 면접관은 나에게 “지금 학교 과도 좋은데, 왜 국문학과에 오려고 하느냐”라고 말했고, 난 그 질문에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울컥하고 말았다. 내 수험생활 전부가 주마등처럼 스쳐갔고, 결국 탈락했다. 한 여대 면접장에서는 나 홀로 초록색 줄무늬 맨투맨, 그 아래에 검정 슬랙스와 코트를 입고 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내가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 같지만 당시에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몰랐다. 당시에 구두에 화이트 셔츠, 검정 재킷에 한껏 단정한 머리를 한 지원자들 속 나는 한 마리의 흑조 아닌 흑조였다. 2차 면접에서 나는 모두 탈락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내가 내린 선택이 ‘실패’라는 결과로 돌아온 것이다.


문득, 나는 그 당시 내가 엄청난 실패를 했다고 생각하며 많이 힘들어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그때의 경험은 나에게 남겨준 것들이 많았다.


라면을 끓일 때도, 그릇장에 붙어진 노란 포스트잇에 적고 외웠던 영단어들은 지금까지도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했고 노량진 곳곳에 남겨진 추억의 흔적들은 지금 가서 봐도 뭉클하다.


한 대학의 교수는 나에게 "국문학과가 오고 싶은 이유"를 물었고 대답을 하니, 그는 "지금 안 되더라도, 꼭 어디선가 봤으면 좋겠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불합격 이후 나는 그 교수님에게 메일을 보냈고, 직접 답장까지 받게 됐다. 방금 한번 더 보게 된 그 메일은, 또 다른 생각을 하도록 이끌었다.


실패의 순간을 ‘옷’ 탓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실패 이면에 가려진 것들을 곱씹으며 왜 그때 그러한 결과가 나왔는지 따위의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나의 패기로웠던 모습과 두려워했던 모습 등을 회고해본다. 몸매에 자신이 없어 매일 펑퍼짐한 옷을 입고, 스트레스로 정수리에 구멍이 생기면 모자로 가리고 다녔던 그때의 나는 없으며, 지금 나에겐 단지 그 아픈 과거를 묻고 새롭게 시작할 인생만이 남아있다.


"선택과 판단의 무게는 겉으론 무거워보이지만 막상 내리고 나면 단지 인생의 잔여물에 불과하진 않나"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렇기에 지금 내린 퇴사라는 선택에 대한 무게도, 쉽게 '무겁다'라고 단정 짓지 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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