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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Jun 23. 2019

피해자가 되면 보이는 것들

사랑하는 남동생에게 쓰는 글

남동생이 20살이 되어, 곧 군대에 가게 된다. 약 반 년정도 남은 셈이다. 남동생이 학교가 아닌, 또 다른 공동체를 만나 약 2년을 지내야 한다는 게, 5살 차이 나는 누나로서는 마음에 걸린다. 머리를 빡빡 민 남동생이 잘 다녀올게 하며 손짓하는 상상을 하면,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시큰해진다.


나에겐 두 명의 동생이 있다. 2살 차이 나는 여동생과, 5살 차이 나는 남동생이다. 여동생과는 쌓아온 정도 많고, 물고 뜯고 싸우며 정이 많이 생겼지만 남동생과는 그렇지 못했다. 우선 다른 성별, 그리고 비슷한 성격 때문에 마찰이 없었다. 아, 많은 나이 차이도 한 몫했을 것이다. 남동생과 여동생은 자주 싸우니까.


어렸을 적, 남동생은 집안의 유일한 남자라는 이유로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그 사랑을 잘 먹고 자라서 그런지, 남동생은 뚱뚱한 체형의 유년기를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슬픈 일인데, 나도 그땐 중학생 정도였으니 늘 그런 뚱뚱한 동생을 놀리곤 했다. 야 돼지야, 그만 먹어라는 식의 이야기를 뱉었다. 그래도 동생은 계속 먹었고, 살은 점점 불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12살의 동생은 학교를 다녀오더니 살을 빼겠다고 선언을 했다. 갑자기 왜?라는 말도 묻지 않은 채, 나는 그래 빼볼 테면 빼봐라는 식의 대답을 했다.


뜨거운 여름의 장마철. 비가 올 땐, 지하 주차장에서 혹은 아파트 통로 앞에서 미친 듯이 줄넘기를 하는 동생을 보고서도 난 단 한 번의 응원의 말을 해주지 않았다. 비 오는데 나가?라는 식의 이야기만 던졌을 뿐. 17살의 나는,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바빴고 동생이 뭘 하든 크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집에서 나가려고 챙기는 동안 동생은 멸치와 계란밥 달랑 세 가지를 먹고 있었다. 동생의 얼굴을 보니 반쪽이 사라져 있었다. 내가 내 나름대로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동생은 정말로 살을 빼고 있었으며 그 살의 반토막이 날아가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를 못해줬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안하다. 그래서 내가 남동생에게 바치는 글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와 같은 중학교를 입학하게 된 내 남동생은, 입학하기 전 나와 여동생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왜 그때 살을 빼기로 결심했는지. 학교 체육시간에, 앞구르기를 하는데. 동생이 구르기를 하다, 입은 티셔츠가 올라가 친구들에게 맨 살의 배를 까게 되었는데, 그 앞에 자신이 짝사랑했던 여자아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모두들 킥킥대고, 웃으며. 돼지라고 놀리는 동안, 내 남동생은 그 여자애가 자신에게 보낸 경멸 비슷한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정말 위로해주지 못한 나를 반성했다. 그 당시에 왜라고 한 번 물어볼걸. 독려해줄걸. 참 마음에 걸린다.


동생은 살을 빼고, 중학교에 입학하자 참으로 많은 친구들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관계에 대해 일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그중 가장 마음 아팠던 건, 바로 왕따였다. 내 동생이 왕따를 당하고 있다, 그 자체로 집안에 엄청난 폭풍을 몰고 왔다.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난 당해본 적도, 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난 늘 편을 가르는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도 잘 지내왔었고, 친구도 많았었다. 그리고 난 그때 남자아이들의 친구관계가 여자보다 더 예민하고 날카롭다는 걸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영화 <파수꾼>처럼 말이다.


동생은 살이 더 빠졌고, 아직까지 그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물론 14살, 그 잠깐 때의 일이라도 동생에겐 인생에 있어 큰 상처였을 것이다. 난 그 아이들에게 내 동생이 왜 그렇게 까지 싫은지, 싫어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내 눈에, 내 동생은 정말 착하고 좋은 사람인데. 어떤 이유 때문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어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매일 침대에서 끔찍한 카톡 감옥에 갇혀 울고 있는 동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사건은 정말 나에게도 큰 상처였고, 늘 동생이 어느 집단에 들어갈 때마다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볼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되었다.


남동생은 정말 잘생겨졌다. 지금은 키도 181에, 말랐으며, 늘 어디 가나 잘생겼다는 말을 듣고 산다. 그 이후로 동생은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적응을 잘하고 잘 어울린다. 내가 부러울 정도로 말이다.


가끔, 지나갈 때마다 통통한 남자 꼬마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내 남동생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미소를 짓는다. 귀엽다. 나도 동생이 이만할 때 더 잘해줄걸. 속으로 삼킨다. 그리고 남동생이 상처 받았던, 중학생 때 즈음된 남자 아아들이 삼삼오오 교복을 입고 피시방에 가는 장면을 보면 저기서도 누군가 한 명은 힘들지 않을까. 속으로 상상하곤 한다.


다들 속으로 감추고 사니까 말이다. 누가 묻기 전엔, 혹은 누가 묻더라도 대답하기 꺼려하는 게 바로 과거의 트라우마일 것이다. 피해자의 가족이 된 것도 나의 과거, 트라우마이다. 글로는 전하지 못하는 당시의 감정들이 많다. 군대 가기 전 신검을 받고, 제일 높은 등급이 나왔다고 좋아하지만 한 편으론 씁쓸해하는 동생을 보면서 참 내 동생 대견하게 잘 살아왔다고 한 번쯤 글을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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