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의 꿈-
선인장의 꿈 연재 -03
* 짧은 단편 소설
이상한 날이었다.
그녀는 시청률 높은 막장 드라마의 막내 스태프로 일하며 신림동 5평짜리 원룸을 동생과 나누어쓰고 있다. 책상, 옷장 그리고 동생의 싱글침대를 두고 남은 공간에 요를 깔고 잠들었다. 서너 시간 뒤, 그녀는 4시 30분에 눈이 떠졌고, 아직 울리지 않은 알람을 껐다. 이상했다. 조용하고 잠잠한 날이었다.
그녀는 과열된 보일러로 후끈해진 방 안 공기를 내보내기 위해 창문을 조금 열었다. 온 세상이 소리를 잃은 듯 적막으로 가득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온 동네가 눈으로 뒤덮힌 바닥에는 가로등 불빛이 떨어져 주황빛을 머금고 있었다. 흰 바닥 탓일까. 그녀는 자신이 도시의 조감도 안에 들어있다고 생각했다. 두껍게 쌓인 눈 아래 온갖 소음이 잠긴 듯했다. 그녀는 창문을 닫고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갈색 병에 담긴 자양강장제를 마셨다.
서울 버스는 늦는 일이 없다. 그러니 시간에 맞춰 정류장에 도착하면 지각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15분째 버스는 오지 않는다. 초조해진 그녀는 잡히지 않는 택시를 잡으려 도로에 몸을 반쯤 내놓았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발을 보며 서울 전체가 마비되어 누구도 출근하지 못하는 상상을 했다.
결국 그녀는 바퀴를 포기하고 걸어서 출근하기로 했다. 양말은 정류장에 도착한 순간부터 젖어있었고 발끝이 시려왔다. 얼어붙은 코를 훌쩍이며 끝이 보이지 않는 눈밭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이 녹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그녀의 육안으로 보일 만큼 빨라졌다. 평소에 그 많던 차도, 버스도, 택시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째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못했을까. 그녀는 동료로부터 눈보라를 뚫고도 출근했다고,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는 상상을 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들을 떠올리며 하염없이 걸었다.
나는 이제 네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 그녀는 4년 만난 연인에게서 낯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에 대해 모르게 된 지 꽤 오래되었을 때 헤어졌다. 밤을 새워 다퉜고 날이 밝아지기 직전 마지막 섹스를 하고 헤어졌다.
그녀는 술에 취한 친구의 토사물을 나서서 치우는 사람이고, 뒷담화는 어색함을 달래기 위한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친한 후배에게 과일을 사다 주는 사람이면서, 감당하지 못 하는 일을 받아내고 그 일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준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연구실에서 희생된 동물들의 참극을 말하는 사람이면서, 친구 하는 건 서로에게 유용할 때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녀를 도무지 알 수 없을 거라고, 무슨 수를 써도 전부 알게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녀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나쁜 사람이라는 소문을 피하고 싶어 한다. 모두가 눈보라를 뚫고 출근했을 때, 그녀 혼자 따뜻한 집에서 받게 될 전화가 두려웠던 것이다.
눈은 밟을 때마다 정강이까지 차올랐다. 동상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발가락을 조금씩 오므렸다 펼치며 걸었고 눈에 젖어버린 휴대폰을 20초에 한 번씩 들여다봤다. 이상했다. 주차 자리를 찾느라 빙글빙글 도는 차들이 없다는 것을 보고도 지나쳤을 때, 늘 고갯짓으로 인사하던 경비가 없다는 걸 보고도 지나쳤을 때, 패딩 점퍼에 쌓인 눈을 털어내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손을 녹이기 위한 생강차를 사러 무인 편의점에 들렀고 5분 정도 늦게 사무실에 도착했을 땐 아무도 없었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뚫고 온 사람이 그녀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곳엔 누구도 없었다. 그녀 자신만이 유일한 목격자였고 그 어떤 것도 뿌듯하거나 자랑스럽지 않았다. 서울 시민 모두가 출근하지 못했던 그 날 그녀는 홀로 사무실에 도착했고 지금껏 그녀가 살았던 삶 중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자랑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에 세계는 마비되었다. 라디오에선 이 눈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거라고 말했고, 세계 종말을 말하는 사람이 나와 과학적인 이유를 들며 주장했다. 그동안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단 조용한 결말이지 않은가. 이렇게 눈에 잠겨 조용히 사라질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꽤 괜찮은 것 같다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서 자던 동생을 깨워 소식을 알려주고 좋아하는 음식들을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늘을 빽빽하게 가리며 내린 눈 탓에 그날은 해가 뜨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 처마에서 눈을 피하며 택시를 잡던 그녀 앞에 461번 버스가 20분 늦게 도착했다. 도로 상황으로 곤란하고 화가 난 버스 기사는 그녀를 힐긋 보더니 문을 열고 기다렸다. 안 타세요? 네, 안 타요. 그녀는 출근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눈을 밟지도 않았고, 발이 동상에 걸리지도 않았고, 텅 빈 주차장을 보며 눈을 털어내지도 않았다. 생강차를 사 마시지도 않았고, 사무실에 홀로 들어가지 않았다. 신발이 살짝 잠기도록 쌓인 눈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가 자는 동생을 한번 들여다봤고, 개어둔 요 위에 앉아 패딩점퍼를 벗었다. 자는 동생을 깨워 눈이 온다는 걸 알려주고 좋아하는 음식을 배달 시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