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다귀가 말하도록 두세요
지금으로부터 반 세기 전, 땅속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던 중세의 잔해가 폭탄과 무한궤도에 의해 파헤쳐져 세상에 드러났다. 그리고 전쟁 후 이뤄진 대대적인 발굴 작업을 통해 어마어마한 양의 물질적 사료 (fonti materiali)가 쏟아져나와 그를 연구하는 중세 고고학이란 새로운 학문이 태어났다. 중세 고고학은 문서 자료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중세학과 차별되었으며, 시간적 배경과 연구 대상의 차이 덕에 고전 고고학에 흡수되지 않은 채 별개의 학문으로 남을 수 있었다.
당시 중세학자들이 가장 중요시했던 물질적 사료는 껴묻거리였다. 그들은 고인과 함께 무덤에 묻힌 물건들이 그 사람의 인종과 출신지, 지위와 경제력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생각했으며 이를 통해 중세 초기에 어떤 민족이 어느 경로를 통해 제국으로 이주했는지 알아낼 수 있다 주장했다. 그러나 단순히 고트족 양식의 칼집이 무덤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무덤 주인이 고트족 전사였을 것이라 말하는 것은 억측에 불과했으므로 (제국군 장교의 전리품이었을 수도 있고 귀족의 북부 여행 기념품이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러한 주장은 곧 힘을 잃었다.
사실 부장품 매장은 전통적인 장례 의식의 끝부분에 행해지던 형식적인 절차였다. 공개적으로 (누구나 참관할 수 있었다) 치러진 장례식에서 사람들은 죽은 이를 기억하고, 또 그의 후예들을 사회에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여러 물건들을 무덤에 넣었던 것이다. 고로 부장품의 종류나 그 화려함은 고인의 부를 상징한다기보다 그가 속했던 사회의 경제적 상황이 어땠는지, 또 그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었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할 수 있겠다. 이런 풍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사라져가다 7세기 이후로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는데, 이는 기독교의 전파로 전통적인 장례 의식이 터부시된 탓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고 지배 구조가 확립됨에 따라 귀족과 지방 유지들에게 있어 부와 권력의 세습이 한결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윗것들이 바뀔 때마다 아랫것들을 어르고 달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장례식과 같은 형식적 행사들의 존재가치가 낮아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