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 신, 그리고 수전노
게르만 민족들이 비잔틴의 묵인 아래 서로마 제국의 땅을 한 덩어리씩 차지하고 나라를 세웠을 때부터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은 왕의 지배 아래 살아가게 되었다 (유일한 예외는 아이슬란드로, 1262년 노르웨이의 하콘 4세를 왕으로 받아들이기 전까지 부족 연합으로 남았다). 초기 중세 로만-바바리안 왕국에서의 왕권 (regalita'), 즉 왕이라는 지위가 상징하는 바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절대왕정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오랜 시간 떠돌아다니던 방랑자들의 지도자였던 왕들은 땅을 소유하고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민족을 이끄는, 즉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로 받아들여졌다. 피로 이어진 씨족 사회의 구성원이었던 왕과 그의 전사들은 왕국 건설 이후에도 얼마간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들 사이의 끈끈한 결속이 곧 왕의 권위와 권력의 원천이었다 말할 수 있겠다.
12세기까지 왕위의 세습에 관한 법률은 제정된 적 없었다. 사실 그러지 못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초기 중세 왕이란 자리는 민중의 대표 (Grandi; 여기서의 민중이란 모든 백성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왕국군 소속의 자유민 남성들만을 칭하는 말이다)들이 모여 후보들 사이에서 뽑는 선출직에 가까웠다. 후보가 왕의 핏줄이건 맏아들이건 상관없이 대표들의 동의를 얻어야 왕위를 승계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입김이 셌는데, 그렇다고 왕과 대표들이 대립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왕 또한 왕위를 잇기 전에는 한 사람의 민중 대표였으니 누구보다 더 그들을 잘 이해하고 그 권리를 존중했던 것이다. 물론 원하는 이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귀족들이 치열한 암투를 벌였을 때도 있었지만 (프랑크 왕국의 예), 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기독교가 (정통 카톨릭이던 아리우스주의던 간에) 온 유럽을 점령하고 교회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자 왕들은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왕위의 신성화를 꾀했다. 그들은 대관식을 통해 자신들의 지배와 통치가 신께서 원하신 바이며 고로 정당하다는 것을 공표하고자 했는데, 몇몇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스스로를 예수의 대리인 (Vicario di Cristo)이라 칭하기도 했다. 12세기에 고대 로마 법전이 복원되고 수정되어 절대 왕권에 대한 개념이 퍼지기 전까지 종교와 왕국들 사이 관계는 원만하게 유지되었다.
800년 성탄절 밤, 로마의 주교 (교황 레오 3세)가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카를루스 대제에게 왕관을 씌워 준 그 순간 제국의 이름이 서유럽에서 되살아났다. 교황과의 계약에 따라 황제는 로마 교회를 보호할 의무를 지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그는 곧 로마 주변의 옛 랑고바르드 왕국령을 차지할 명분을 얻게 된다. 그리고 10세기 중반부터 13세기 중반까지 “제국”은 더 이상 서방의 최강국이 아닌 독일 왕국을 이르는 말로 통했는데, 이는 독일의 왕이 이탈리아의 왕, 즉 로마 교회의 수호자 역할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토 1세의 제위 시절부터 (962~1024)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스스로가 다른 왕국의 왕들보다 우월하다 여겼으며, 국제적으로 인정된 그 어떤 권리도 없었으나 헝가리와 같은 인접 왕국들의 내정에 지속적으로 간섭했다. 11세기 말부턴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사이의 관계가 껄끄러워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교황이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교황령, 즉 자신이 다스리는 자주적인 국가를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도 나중에 이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권력은 곧 국고에서 나온다 할 수 있다. 교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충성스런 신하들을 치하하고, 궁정을 유지하고, 축제를 열어 왕국의 건재함을 온 천하에 알리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중세 초기의 왕은 땅을 통해 모든 것을 해결했다. 왕국 토지의 대부분은 당연히 국왕 소유였으므로 (그 땅을 정복한 전사가 바로 왕 본인이었기에), 수확물의 일부를 신하들에게 나눠주며 정치적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11세기에서 12세기 사이 지방 귀족들의 힘이 커지며 상황이 변했다. 국가 소유의 토지가 줄어들어 충분한 수입을 얻지 못하게 된 왕들은 이내 자신들의 법적 권한을 사용해 국고를 채우게 된다. 다시 말해 벌금과 세금, 각종 시설의 사용료를 걷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미 영주들이 영지민들에게 걷고 있던 세금에 그대로 더해져 이중고를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