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고대 말기 유럽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며 기존의 제도, 정치적 상징들과 힘 있는 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송두리째 바꿨다. 이 이질적인 유일신교는 조각조각난 제국을 다시 하나로 뭉칠 구심점을 찾고 있던 엘리트층은 물론이고 삶이 고단했던 이들, 누구보다 더 기독교 교리 (특히 평등주의)에 공감하고 구원이 찾아오길 바랐던 하층민들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도시와 그 주변에서 형성된 기독교 공동체들은 제국 계층 사회의 영향으로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 계급의 차이를 두게 되었으며, 그러한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변경 지역에 자리 잡은 공동체들은 다가올 심판의 날을 기다리며 무소유를 실천, 가난한 수도자들로 남았다.
코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제국의 여러 정식 종교들 중 하나로 받아들이고 (밀라노 칙령) 신학자들과 성직자 대표들을 니케아에 불러 모아 “옳은” 기독교 교리 (로마인들은 모든 일엔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한다 생각했다. 바퀴의 규격, 포도주를 만드는 법, 아치의 너비…)를 주문했을 때부터 각 공동체 간 믿음을 실천하는 방법의 편차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종말론적 시각을 가지고 문명과 동떨어진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곧 그들은 성인이라 불리며 지방 교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 성인들을 위시한 수도주의자들은 교회와 황권의 유착과 교계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교회 또한 성인들이 공동체 정신을 저버리고 독단적으로 행동한다며 비난했다.
비잔틴에서 시작된 수도주의의 물결은 금세 라인강 유역에 다다랐으며 개인적 수행과 공동체 생활 사이에서 균형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서유럽 수도주의자들에 의해 결실을 맺게 된다. 노르챠의 베네딕투스는 몬테카씨노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자들을 위한 규칙서를 집필했으며, 공동체 생활과 그 구성원들 사이의 평등, 노동과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아일랜드 출신 성직자 콜룸바누스는 봅비오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베네딕투스와는 반대로 개인 수행의 완성을 중요시했으며 침묵과 복종, 단식 등 다소 극단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이렇듯 수도주의가 중앙 교회의 손을 피해 자유로이 꽃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들 공동체 (수도원)가 주교의 영향력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교들은 주교좌성당 (대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구 (Diocesi) 안에서만 활동했다. 주교들 사이 권한의 차이는 (적어도 11세기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로마의 주교 또한 사도 베드로의 후임자라는 상징적인 칭호 외에는 다른 주교들과 (다시 말하지만, 11세기까지는)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7세기와 8세기 사이 프랑크 왕국과 랑고바르드 왕국에서는 수도원 건설이 더 이상 종교인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는데, 수도원과 그 주변 땅은 상속권에 따른 토지 분할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방금 태어난 막냇동생에게 땅을 떼어주기 싫었던 귀족들이 앞다투어 수도원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수도원은 지역 경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문화와 교육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러한 유행은 귀족들에게 더 큰 권력과 특혜를 쥐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왕들 또한 귀족들에 맞서 새로운 수도원들을 건설하는 데 멈추지 않고 기존 수도원들을 재건축했는데, 이를 통해 왕실의 재산을 여러 전략적인 위치에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었으며 수도원장의 임명 또한 왕의 재량대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덕분에 7세기에서 9세기 사이 수도원들은 주교의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웠을 뿐 아니라 왕국법이 적용되지 않는 치외법권으로서 많은 특혜를 누렸다.
이 시기 귀족들이 세운 수도원들 중에선 여성 수도원들도 있었다 (사료의 부족으로 정확한 비율은 알 수 없음). 수도자의 길을 택한 귀족 영애들은 아버지 소유의 수도원에 들어가 가족의 재산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가문의 문화적-정치적-종교적 위상을 드높이는 데 일조했지만, 이들의 출가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향한 반란 (다른 귀족들과 동맹을 맺기 위한 정략결혼의 제물이 도망친 셈이었으므로)으로 여겨지곤 했다.
카를루스 대제는 817년 아헨에서 공의회를 소집, 제국의 모든 수도원들이 하나의 가르침 (베네딕투스의 그것)을 따르도록 만들었다. 또한 일반 성직자들에게도 (수도자들이 실천해 온 바와 같이) 순결을 지킬 의무를 부여했으며 사택 (Clergy house)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강제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신자 공동체를 의미하던 교구에 정해진 구역을 할당함으로써 주교의 권한을 강화했으며, 교회 내부 규정에 불과했던 십일조 (Decima) 납부를 국가가 나서서 장려하는 등 여러 종교 관련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10세기에 와선 지방 귀족들의 힘이 점점 커지며 십일조 납부와 성례를 받는 일 (즉 경제적-종교적 활동) 이 왕과 주교의 손을 떠나게 되었으며, 이는 다시 지방 귀족들의 배를 불리게 된다. 여기에 대해선 다음에 이어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11세기 교회와 수도원들은 더 이상 사람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키지도, 사회의 불평등과 만연한 폭력을 없앨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의미 없이 반복되는 공동체 생활에서 벗어나 스스로 답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는데, 수많은 운동들이 일어나는 와중에 고대 말기 수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색을 멀리하고 금식하며 오지에 은둔한 채 수행하는 이들, “성인”들이 돌아오게 된다. 성인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은 세례 받는 것을 거부하고 미사에 참여하지 않는 등 교회와 성직자들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11세기 중반 밀라노에선 부제 아리알도가 성직자들의 문란한 성생활과 독성죄의 무분별한 적용 (즉 파문의 남용)과 같은 밀라노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며 내부의 개혁을 위한 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사회 취약 계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밀라노 주교 귀도의 손에 아리알도가 암살당하고 난 뒤엔 단순 폭동으로 변모하고 만다. 중요한 것은, 이 운동을 통해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민중이 사제 계급을 향해 “선을 넘었다”, 즉 높으신 분들의 잘못에 대해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처벌과 개선 방안을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종교 개혁 운동의 여파가 새 수도원 건설까지 이어진 경우도 종종 있었다. 카를루스 대제의 노력이 무색하게, 수도원들이 다시 서로 다른 가르침을 내세우며 제멋대로 나아가기 (즉 로마 교회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아키텐의 공작 기욤 9세가 세운 끌뤼니 수도원은 엄격한 규율을 따르는, 검은색 수단을 입고 (매우 비쌌다) 지역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하던 귀족 출신 수도자들의 집단이었던 반면 사제 로베르토가 세운 시토 수도원은 옛 베네딕투스의 규칙을 따르는, 소박한 흰 옷을 입고 밭에 나가 땅을 일궈 자급자족 (지금까지도 시토회 소속 수도자들은 맥주를 빚어 돈을 번다)하며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수도자들의 공동체였다.
순수파 (Catari)와 같은 몇몇 교파는 현재 교회의 구조와 그 교리에 결함이 있다고 판단,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순수파 교인들은 물질적 세상은 악마의 창조물이며 영혼만이 신께서 만드신 것이므로 세상과 연을 끊고 물질적인 모든 것을 포기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 주장했으며, 발도파 교인들은 서방교회가 뿌리까지 썩었으며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 역설했다. 물론 로마 교회는 자신들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모든 운동과 교파들을 이단으로 낙인찍고 그 주동자들을 파문, 추방, 심하면 화형에 처했다.
13세기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결정된 바대로 지역마다 본당 (Parrocchia)이 건설되어 사설 교회와 집회 장소들이 사라졌으며, 신자들은 이제 대성당까지 갈 필요 없이 가까운 본당에서 세례와 혼인 등 대부분의 성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신자들이 따라야 할 규칙들도 공표되었는데, 일 년에 한 번은 고해성사를 봐야 한다던지, 누군가 죽기 전에 꼭 사제를 불러야 한다던지 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교황의 권위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지만 사회적 불평등과 계층 간 갈등 또한 심했는데, 사제도 아니면서 자발적 가난 (Pauperism)과 이타적인 삶을 살며 성경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아씨시의 프란체스코였다. 자신을 따르는 열한 명의 사람들과 함께 작은 형제회를 세운 그는 주교 귀도 (옛 밀라노 주교와는 다른 사람이다)의 도움으로 교황 인노첸티우스 3세를 알현할 기회를 얻게 되고, 그 자리에서 작은 형제회를 정식 수도회로 인정해 달라 청했다. 로마 교회는 작은 형제회를 비롯한 다른 소규모 공동체들 (도미니코회, 성 아고스티노회, 가르멜회 등)을 정식 수도회로 인정하고 탁발수도회 (Ordini mendicanti)라 칭했는데, 이는 단지 그들이 기특해서가 아니라 써먹을 수 있는 장기짝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탁발수도사들은 이단 심판과 대중을 상대로 한 포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