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 쌓은 도시, 사람들의 도시
고대의 마지막 학자라 알려진 세비야의 주교 이시도루스는 저서 “어원학 (Etimologie)”에서 라틴어 단어들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설명했다. 그는 건물과 농경지와 관련된 단어들에 대해 다룬 15권 (20권까지 있다)에서 공공시설들과 그 어원을 설명하며 도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전까지 도시를 가리키는 말은 Civitas와 Urbs 두 가지로 곧잘 혼용되곤 했는데, 이시도루스는 그 둘이 뜻하는 바가 다르다면서도 함께 도시의 개념을 구성한다 말했다. Civitas는 Cives (치베스; 사회구성원)로부터 온 말로 곧 Citta’/City/Ciudad의 어원이며, “유대로 엮인 여러 사람들의 집합”을 뜻한다. 이와는 다르게 Urbs는 도시를 외부와 분리하고 구별해 공간적으로 제한하는 “두꺼운 벽”을 의미한다.
로마인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제국의 각지를 잇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 길과 길이 만나는 연결점으로서 도시들은 정치-행정-경제의 중심이었으며 물자의 원활한 유통과 지역사회의 유지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제국 시스템의 기반이었다. 그러나 3세기 제국 사회에 닥친 복합적 위기 (황제 암살, 반란, 내전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과 경제 위기, 통화가치 하락과 증세, 키프로스의 역병)로 인해 도시 인구가 한 차례 크게 감소한다.
코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의 개혁은 기독교 신자 공동체와 시민 사회의 일치를 불러왔다. 이미 대부분이 기독교로 개종한 상태였던 도시의 엘리트들은 교회의 교계제도로부터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나아가 드높일 수 있는 가능성을 봤다. 교회법은 주교 (곧 도시의 책임자)가 사제들과 민중에 의해 선출되도록 규정했는데, 이는 엘리트층 (즉 민중의 지도자)에게 도시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곧 도시들은 그들의 입맛에 맞춰 그 형태를 바꾸게 된다.
광장 (Foro)은 도시의 경제 상황에 따라 그 운명을 달리했는데, 시장이 매일 열리는 도시에선 공공시설로 남았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구역별로 나뉘어 주거 시설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극장, 목욕탕이나 광장과 같이 고대에 지어진 공공시설들은 원래의 쓸모를 잃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거나 새 건물을 지을 자재를 얻기 위해 파괴되곤 했다. 주교좌성당 (대성당)이 도시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올랐으며 한때 도시 외부 먼 곳에 조성되었던 공동묘지는 8세기경부터 도시 안쪽으로 (주로 성당 주변) 자리를 옮겼다. 벽은 단순히 방어 목적이 아니라 도시 주민들을 외부인들과 격리하는 경계선 역할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Cives는 오직 “벽 안에 사는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지중해로부터 먼 북부 내륙 지역에서는 도시의 발달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진행되었다. 그곳에서는 도시들이 11세기가 되어서야 형성되었다. 성이나 수도원과 같이 요새화된 주거 시설을 중심으로 농민, 장인, 기사들이 모여 새로운 마을들이 생겨났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주민들의 수가 불어나고 경제 활동이 더 활발해지며 자연스럽게 규모가 커져 도시로 발달하게 된 것이다. 로마인들이 세운 도시와 11세기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난 도시는 그 형태에서 차이를 보였는데, 고대의 계획도시는 직각으로 교차하는 도로들과 용도별로 나뉜 구획들, 주 도로에 맞춰 벽에 나 있는 성문 등 체계적인 구조를 가졌던 반면 11세기 도시는 중심부로부터 불규칙하게 퍼져나가는 거미줄과 같은 모습이었다.
도시 인구의 증가와 그에 따른 도시의 확장은 12세기 유럽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 11세기와 12세기 사이 제국 도시 (로마인들이 세운 도시)에서 일어난 토지 매매에 관련된 공증 문서들을 살펴보면 문으로부터 이어지는 주 도로를 따라 벽 바깥의 땅이 구역별로 나뉘어 있었으며 도시의 확장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2세기 중반부터는 구도심과 신규 구역을 가르던 벽이 허물어지고 더 넓은 지역을 감싸는 새 벽이 세워졌는데, 이를 통해 스스로를 외부와 격리하고자 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최대한 많은 이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몸집을 불리고 힘을 키우려는 지도층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벽의 증축은 결과적으로 도시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기도 했다. 새로 파낸 해자를 채우기 위해 끌어온 물줄기가 수로를 따라 도시 내부를 통과하게 되면서 수력을 이용하는 시설들 (물레방아 등)이 세워졌으며, 물자를 도시의 각 부분으로 더 빠르게 운송할 수 있게 되면서 도시는 무역과 소비의 장에서 수공예품 생산의 중심지로 변신하게 된다.
이 시기 몇몇 도시들의 주민들은 스스로를 Civitas, 즉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여겼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왕과 귀족들과의 협상을 통해 자유 헌장 (Franchisia)을 얻어 봉건제에서 벗어나 부분적인 자치권을 얻었으며 세금과 역역 (Corvee; 매년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무보수 노동) 면제 등 다양한 혜택을 보장받았다. 봉건 사회와 자치 도시, 특히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권을 주장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프레드리히 1세 “바르바로싸”와 북부 이탈리아 자치도시들의 롬바르디아 연맹 사이의 갈등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