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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기 Nov 13. 2024

봉건제와 영주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

몽테스쾨와 같은 18세기 학자들은 당시 사회의 지방분권적 경향, 즉 중앙 권력의 파편화를 중세의 봉건제와 동일시했는데, 이는 이탈리아의 인류학자 쥬세페 세르지가 말한 대로 “현재의 왜곡된 렌즈를 통해 과거를 바라보기 때문에” 생겨난 잘못된 관점이었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같은 오류를 범하곤 한다. 실제로 1800년에서 1900년 사이 발행된 역사서들은 저마다 중세 봉건제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1. 카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에 따르면 봉건제는 사회가 공산주의 낙원으로 향하는(즉 진화하는) 과정에서 거쳐 가는 경제 시스템 중 하나에 불과했다. 

2. 마르크 블로크는 봉건제가 군사력을 가진 군주의 지배, 권력의 분립, 군주와 봉신 사이의 계약, 충성의 보상으로써 토지를 하사하는 관습 등 여러 요소 위에 세워진 복잡한 사회구조라 보았다. 

3. 죠반니 타바꼬는 봉건제 사회에서 계약으로 묶인 사람들의 관계와 그에 따른 정치적 영향에 주목했다.

 

봉건 제도는 9세기 초 카롤루스 제국 (전 프랑크 왕국)에서 생겨났다. 카롤루스 대제 제위 시절 프랑크 귀족들의 군사력과 그에 대한 카롤링거 왕가의 통제력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황제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귀족들을 구워삶아 군사적 지원을 얻어냈는데, 이를 통해 인근 로만-바바리안 왕국들을 정복해 제국령으로 흡수할 수 있었으며 전쟁 (또는 협상) 과정에서 얻은 막대한 재물을 다시 귀족들에게 분배하며 자신의 지배력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더 많은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황제는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지역마다 파견된 행정관들에게 법적-군사적 권한과 부분적인 조세권 (봉급 대신이었다)을 부여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8세기 후반부터 위와 같은 시스템 (도움과 보상의 순환 체계)은 정형화되어 봉신 제도 (Vassallaggio; 봉건제의 초기 형태, 영토의 세습이 불가했다)로 정착한다. 이제부터 지배자는 그 아래 봉신들과 법적 효력이 있는 계약으로 맺어지게 되었으며, 충성과 군사적 지원의 대가로 땅을 하사하게 된다. 그러나 카롤루스 대제의 사후 제국이 세 왕국으로 쪼개져 서로 싸우기 시작하자 귀족과 왕들 사이 힘의 균형 또한 깨지게 된다.


초기 중세는 가난의 시대였다. 적은 인구, 적은 생산량, 지역 간 단절로 온 대륙의 경제가 침체되고 화폐와 물자의 유통 또한 원활하지 못했던 시절, 부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은 땅에서 났다. 땅 가진 지배자들, 즉 왕들은 기사들에게 봉토를 내려 군사력을 보강했고, 농부들에게는 소작을 줘 그들이 경제적으로 의존하도록 (즉 그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자신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었으며 교회와 수도원들에게는 땅을 기부해 “영원한 구원”은 물론 고위 사제들과 인연을 맺었다.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땅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고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강한 군사력이 선제되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왕들은 성과 요새의 축조를 통해 지역을 장악하고 봉신들을 다독이며 권력을 유지하려 애썼다.


제국의 분열 이후 약화된 왕권 덕에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된 영주들은 한때 왕들이 했던 대로 성을 짓고 군대를 조직했으며 프리랜서들을 모집해 땅을 하사하고 봉신으로 삼았다. 그리고 계속되는 전쟁으로 왕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백성들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새로운 지배자를 찾아 고향을 떠나 성 주변에 모이기 시작하며 (세금을 납부하거나 불침번, 자경단 활동, 노역에 동원되는 대가로 보호받았다) 영주들은 자기 영지에선 왕처럼 군림하게 되었다. 이들은 또한 땅과 사람들에 대한 권리 (Giurisdizione)를 사유화해 제 마음대로 나누어 팔고, 증여하고, 물려주었다. 극단적인 예로, 한 농부가 세 명의 영주에게 서로 다른 의무와 권리로 종속되는 경우도 있었다.


9세기 (카롤루스 제국)와 12세기 (포스트 카롤링거) 사회는 뭇 사람들이 떠올리곤 하는 하나의 계급 사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보단 크고 작은 연결점, 즉 영지와 영지가 불규칙적으로 이어진 그물망에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당시 사회를 “현재의 왜곡된 렌즈”를 통해 한 덩어리의 봉건제 피라미드처럼 바라본다면 다음과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 

1.    사회의 모든 면이 피라미드의 정점, 즉 왕을 위해 돌아갔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왕이 봉신들을 거느리긴 했으나 모든 귀족들을 봉건제를 통해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며, 봉신들의 봉신들에게 충성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

2.    봉신들 사이에 계급이 나뉘어져 있었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왕 아래 왕의 봉신들, 그 아래 귀족들의 봉신들… 그러나 봉신 관계는 철저히 개인과 개인 사이에 맺어진 계약 관계였으므로, 사회적 지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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