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늦게 일어나서 스타벅스에 가지 못했다. 억지로 갈까 고민하다가 시간의 각이 안 나서 집에 남기로 결정한다.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가루커피를 컵에 붓는다. 누나가 준 스타벅스 1호점 컵이다. 문득 가족에게 연락이 뜸했다는 생각이 든다. 캐나다 여행을 다녀와서 누나와 메시지를 주고받지 못했다. 그만큼 내가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캐나다 여행을 다녀온 지 딱 2주가 됐다. 내가 없을 때 나를 많이 찾았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내 역할이 크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나는 존재로 나를 증명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존재만으로 안정감을 주는 사람 말이다. 내게는 그런 의지가 내재되어 있다.
어제는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방황했다. 갈피를 잡지 못했다. 조금 침체되어 있었고 계기가 필요했다. 첫 번째 책 <이란표류기>를 낸 출판사 대표께 연락했다. 지금은 출판사 방향이 바뀌어서 아동서적을 중심으로 책을 내고 있다고 했다. 실리콘밸리 책을 내고 싶은데 한국의 인식이 어떤지 물었다. 대표께서는 한국 분위기나 출판시장보다는 긴 호흡으로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KDI나라경제에 실린 <벌레의 눈으로 본 혁신>에 썼듯이 나는 앞을 바라보고 안을 살피자고 말했다. 답은 내 안에 있다. 내가 실리콘밸리 생활을 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거칠게 ‘일상의 혁명’을 말했지만 이걸 넌지시 드러내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엊그제 산 책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힌트를 얻는다. 문과생으로 실리콘밸리에 온 나는 창업자나 엔지니어가 아니다. 따라서 그들의 진부한 시각이 아닌 나만의 새로운 관점으로 실리콘밸리를 바라볼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떨어진 벌레가 되어 실리콘밸리를 보는 것이다. 아이같은 순수함과 호기심으로 이곳을 인식하는 것이다. <알고 있다는 착각>의 큰 목차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질리언 테트는 ‘낯선 것을 낯익게 만들기’, ‘낯익은 것을 낯설 게 하기’, ‘사회적 침묵에 귀기울이기’로 1, 2, 3부를 구성했다. <벌레의 눈으로 본 실리콘밸리>를 가제로 생각해보자. 어느날 나는 벌레가 되어 실리콘밸리에 떨어진다. 이질적인 곳에서 나의 시각으로 이곳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주된 관찰수단은 벌레답게 단순하고 원시적인 방법이다. 걸어서 실리콘밸리를 일주하고, 자전거를 타고 실리콘밸리의 간판을 해석하며, 실리콘밸리의 걸출한 인물들이 남긴 말과 글을 정독하며 그들의 문장을 수집한다. 궁극적인 목적은 실리콘밸리에서 직업인으로서 홀로서고 우뚝서는 것이다. 목차는 ‘걸어서 실리콘밸리’, ‘실리콘밸리의 간판쟁이’, ‘실리콘밸리의 문장수집가’, ‘실리콘밸리의 직업인정신’ 정도가 될 것이다. 첫 번째 큰 목차는 ‘실리콘밸리의 도보순례자’로 바꿀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세부 목차를 처음부터 다듬기보다 사례를 바탕으로 글을 써나가는 것이다.
외국어 수업을 하고 힘을 낸다. 어려움이 있지만 나아갈 것이다. “Keep it up!”이라는 말도 했고 소크라테스의 “Unscrutinised life is not worth living.”이라는 표현도 인용했다.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앞으로 가야 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