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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포 Feb 10. 2021

"아빠, 1년만 더 있다가 와"

딸램의 3단 변신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도 서울에서 지내다가 지방에서 몇 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대한민국 직장인에게 주말 부부는 흔한 일이지만 알게 모르게 애환이 많다. 부부 사이도 부부 사이이지만 아이들과 관계로 고민할 일이 많다. 첫 1년은 그야말로 애틋하다. 특히 어린 딸 일 경우는 더 그렇다. 어쩌다 주말에 가지 않으면 왜 안 오느냐고 야단이다. 전화도 자주 하고 정이 담긴 문자도 자주 보낸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감정도 많이 변한다. 막내딸의 변화를 보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처음 1년을 보낸 후 지방근무가 길어질 것 같아서 막내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아무래도 아빠가 1년은 더 떨어져서 지내야 할 것 같다” 고 말하자 초등학교 3학년인 막내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빠, 그러면 회사를 경찰에 고발할 거야.”


당돌한 말에 그 이유를 물어보니까 “회사가 가정을 파괴하니까” 고발한다는 것이다. 평소에 거침없는 말을 하는 막내딸이라고 하지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생활을 3년 정도 하고 서울로 다시 오게 될 것 같아 막내딸에게 “아빠가 내년엔 서울로 올 것 같다”라고 얘기했더니 의외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빠, 1년만 더 있다가 오면 안 돼?”


그러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아. 그리고 아빠가 오면 잔소리할 거 잖어” 라고 하는 것이었다. 불과 3년 전에 그렇게 아빠를 찾던 녀석이 이렇게 바뀌다니... 한편으론 웃음도 나고 한편으론 허탈하기도 했다. 이제 6학년이 되었으니 달라지긴 했지만, 떨어져 있으면 멀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딸램의 바램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몇 년 더 지방 생활을 했다. 생활하기엔 불편한 것은 없었다. 오랫만에 부모님과 함께 생활했으니까 말이다. 나이든 아들이지만 부모님은 무척 반겨주셨다. 나도 이번 기회에 부모님과 같이 생활하게 돼서 한편으론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런데도 처음엔 퇴근 시간이 쓸쓸했다. 퇴근해서 집에 가면 아이들의 떠들고 싸우는 소리가 오히려 그리웠다. 나는 딸이 셋 있는데 무척 자주 싸워서 평소엔 아주 골치 아파했다. 그런데 떨어져 지내니까 그 소리마저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역시 사람은 부대끼며 살아야 정이 깊어지는 것 같다. 부모님과 같이 사는데도 이런 생각이 드는데 아무도 없는 집을 들어가는 사람은 얼마나 외로울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지방에 단신으로 내려와 있는 사람이 꽤 있다.  가족을 위해서 떨어져 사는 것은 일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한국 남성들의 독특한 자화상이다. 같이 만나서 애기해보면 주말부부 생활이 길어질수록 자신의 공간이 적어진다는 것을 걱정한다.


주말부부로 있는 주위 사람들의 얘기는 한결같다. 처음엔 아쉽고 보고 싶기도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현실에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떨어져 있는 것이 오히려 편해지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남편이 그야말로 집에서 밥 한 끼 먹지 않은 ‘영식님’이니까 주부들의 소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온 말이 “삼대가 덕을 쌓아야 주말 부부가 될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아이들과의 관계도 부드럽지 못하다. 특히 아이들을 지적하는 일이 많다 보니까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냥 못 본체 할 수도 없고 지적을 하면 사이가 멀어지고 나중에 대화마저 끊기게 된다.  관계를 회복하는데 상당히 힘들었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  


중년 남성의 고민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지 오래다. 서울시의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고민 의논 대상으로 “어머니와 의논한다”는 56.7%였는데 반해 “아버지와 의논한다” 는 7.7% 밖에 되지 않았다. 또 다른 조사에서 대학생들의 32%는 아버지와 대화를 거의 안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가정이 어머니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고 아버지는 왕따가 되는 경우가  많다.


집에서 같이 생활을 해도 이렇게 아버지의 위치가 줄어드는데, 떨어져 지내면 더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가족 간에도 노력하지 않으면 저절로 되는 것은 없는 것 같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한 것이 걸렸다. 성장한 후에는 곁에 있으려고 해도 밀어낼 텐데 말이다.  




이후에도 지방과 서울을 오르락 리락하는 생활을 몇 년 계속했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곳으로 이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근무 조건은 지방이 훨씬 나았다. 쉽게 결정을 못하고 고심 중이었는데 철부지인 줄 알았던 땔램이 한 마디 했다.


“아빠, 이번 기회에 서울 못 오면 앞으로 올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잘 생각해봐.”


당시 고3인 막내딸의 이 말을 듣고 서울행을 결심했다. “갈수록 손님처럼 느껴진다”는 아내의 말에도 뜨끔하던 차였다. 생각해보면 어느덧 세월이 흘러 막내딸이 초등학생에서 고3이 됐다. 아빠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1년만 더 있다가 오라고 했었는데  이제 많이 어른스러워졌다.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지 않으면 나중에 엄청 후회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 결정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3단 변신한 딸램이 이제 대학 4학년이다.  아래 그림은 '무제'라는 작품이다. 빵과 도자기처럼 반죽해서 구어서 만드는 걸 좋아한다. 자기 꿈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작품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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