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your turn
신호가 간당간당하다.
평소보다 일찍 회사를 나와 동네에 있는 구청에 들러 일을 보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내리막길을 지나 상가 건물 오른쪽으로 꺾자, 사거리 횡단보도 앞 초록 불이 숫자와 함께 또박또박 점멸하는 게 보인다.
13, 12, 11... 평소 같으면 줄어드는 숫자에 시선을 꽂고 앞뒤 잴 것 없이 냉큼 뛰어 건너려고 했을 텐데
오늘은 그냥 이대로 천천히 걷다가 다음 신호를 기다리기로 한다.
가끔은 느리게 살자.
아직 이른 저녁이고 바쁠 것도, 딱히 할 일도 없다.
그 사이 새로 오픈한 "타코"집이나 구경해 볼까.
왔던 길로 십여 미터쯤 되돌아가서 조금 전 지나친 매장 앞을 두리번 거린다.
원래 있던 초밥집이 몇 블록 아래로 옮겨가고 며칠 전부터 새롭게 영업을 시작한 곳인데
이자까야나 고깃집 등이 점령한 이곳 상권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메뉴이기도 하다.
그런데 깔끔하게 구획된 내부를 쓰윽 탐색하듯 관찰하려는 찰나, 각진 의자 등받이에 느긋이 허리를 기대고 맞은편 (여자) 일행과 수다에 여념 없는, 어딘가 익숙한 라인의 옆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 응? 아들이네?
그때 마침 출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 녀석과 시선이 마주쳤고 우리는 커다란 통유리 사이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양 손을 어깨 위까지 들어 올리고 좌우로 흔들었다. 놀란 듯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개구지게 웃는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아닌 반가움이 가득 묻어있어 바라보는 내 입꼬리도 자연스레 올라간다.
아이 혼자였다면 슬그머니 들어가 봤겠지만 혹여나 같이 있는 친구가 불편해할까 일단은 그쯤하고 서둘러 가게 앞을 벗어났다.
그나저나 이 녀석 봐라.
맨날 땀냄새 절은 남자애들끼리 모여 축구나 하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이성친구랑 단둘이 밥을 먹는 일도 다 있네?
네 앞의 긴 머리 흰색 롱패딩 소녀, 기억해 두겠어 ㅋ
그치만 엄마한테는 말하지 않겠다. 안 그래도 너에 대한 호기심이 갈수록 왕성해지는 분인데
자칫 하다가 디스패치급 취재(취조 아님)가 쓰나미처럼 쏟아질지 모르거든.
이건 남자들끼리의 그, 뭐랄까, 암묵적인.. 그러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당연한 의리 같은 거지.
나는 무슨 은밀한 목격자라도 된 것 마냥 살짝 들떠서 혼자 키득거린다.
좀 전까지 스산했던 11월의 바람이 송풍처럼 가벼워졌다.
요즘은 등교하는 아침마다 자신보다 키가 작은 엄마를 위해 허리를 꾸부정히 꺾어 안아줄 줄도 알고 나를 향해 서슴없이 주먹인사를 건네기도 하지만 중3에서 고1로 접어들던 때부터 한동안, 녀석은 단단히 마음이라도 먹은 것처럼 부모와의 대화나 접촉을 일절 피하고 자신만의 동굴 안으로 숨어들었다.
본격적인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가 도래한 거였다.
이제야 얘기지만 나름 임팩트 있던 그 시기가 지나고 보니까 자식에게 밀착해서 맹목적으로 사랑을 쏟아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조금 거리를 두고 긴 호흡으로 아이의 변화를 받아들이며 기다려주고 인내하는 것이 옳았을지 모른다.
그 무렵의 아이들에게는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파고가 수시로 오르내리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는데 그걸 있는 그대로 지켜봐야 하는 불안과 걱정에 조급해진 나머지 채근하듯 답을 요구하고 억지로 방향을 틀어보려 했던 건 아닌가 자책이 들기도 했다. 의도의 "선함"이 반드시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는 것.
부모의 역할이 과연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긴 어려워도 늘 고민하고 깨우쳐야 함은 분명하다.
시간은 속절없이 간다. 코찔찔이 초딩 입학식이 여전히 기억에 선명한데 어느덧 지랄 맞은 이 나라의 중고등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수능을 며칠 앞두고 있다. 아이의 미래에 또 어떤 이벤트들이 무수히 펼쳐질지, 기왕이면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 보기로 한다. 남들처럼, 남들만큼, 혹은 남들보다 더..따위의 쓰잘데기없는 허위는 집어치우고 오롯이 자신에만 집중하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조금 느려도 좋고 조금 돌아가도 괜찮다.
그건 그렇고...
이다음에 커서 어른이 되면 아빠 용돈으로 한 달에 오백씩 주겠다던 약속을 녀석은 기억이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