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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의향기 Nov 22. 2024

문재적 시인으로부터의

짧은 읽기



나는 바빠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세상은 너무 바쁘게 돌아가서, 세상의 어제와 내일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바쁜 나와 바쁜 세상이 맞물려 대단히 바빴다. 바빠서 나를 돌아보고, 둘러보고, 내다볼 수가 없었다.

.... 궁핍의 여러 목록 가운데 하나가 시간이 없다는 것인데, 자기 시간을 확보할 수 없는 사람처럼 가난한 사람도 없다. 한때 게으름이 아름답다면서 이 브레이크 없는 가속도의 시대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슬렁거리는 산책을 해야 한다고 확성기를 틀어 왔으면서도, 정작 나는 하루 스물네 시간 가운데 온전하게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최근에 한용운의 시를 읽다가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라는 문장 앞에서 숨이 컥, 하고 막힌 적이 있다. 그렇다. 바쁜 것처럼 게으르고, 부도덕하고, 반인간 반자연적인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 이문재 산문집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中.








…. 그랬다. 나도 바빴다. 바빠서 온전하게 나 자신을 보듬고 둘러 볼 시간을 만드는데 한없이 게을렀다.



군 입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새벽, 무언가에 홀린 듯이 수년간 써왔던 일기며 노트들을 싸들고 나와 불살라 버린 이후로 내 글쓰기의 근육은 정지됐고 그대로 퇴화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낯 뜨거운 그 치기로운 의식이 끝남과 동시에 그때까지 나를 지배해 왔던 "읽고 쓰는 삶"에 대한 꿈은, 막걸리집 빛바랜 벽지 위의 오래된 낙서처럼 끝내 덧쓰여지거나 지우지는 못했으나 이룰 수 없는 욕망의 이름으로만 남겨두고 그렇게 바쁘고 게으르게 살아왔다.


하지만 삶의 변곡은 때로 예기치 않은 어느 지점에서부터 출발하기도 한다.

평생을 두고 나를 짓눌러 온 생물학적 부모와 형제들과의 지난한 갈등, 그로 인한 분노와 공황으로 차츰차츰 시들어가다 못해 급기야는 상담과 전문적인 치료를 고민하던 무렵, 나는 마지막으로 내 안에 낙인 되어 있는 것들을 꺼내어 글로써 나열해 보기로 했다.


감정은 늘 직관적이지만 사고(思考)의 필터링을 거친 활자라면 어떤 식으로든 작은 힌트라도 되어 줄지 몰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연관된 많은 기억들은 흘러간 시간과는 별개로 날 것 그대로 남아있었고 될수록 감정의 이입을 배제한 담담한 어투로 천천히 조각을 맞춰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고통스러운 과정 중에 뜻밖에도, 이십여 년 전 인기척마저 드문 으슥한 공원 구석에서 노랗고 발갛게 타오르는 종이 뭉치를 쓸쓸하게 바라보던 내 모습이 어제 일처럼 어른거렸다.

모두 다 말끔하게 타버려 먼지처럼 공기 속 저 어딘가 쯤으로 흩어진 줄 알았던 것들이 오로지 숨을 쉬기 위한 목적으로 심연 속 밑바닥을 훑어가는 절박한 타이밍에 불현듯 모습을 드러낸 거였다.



자기 고백의 치유를 희망하며 결심한 작업에서 또 한번 내가 얼마나 게으르게 삶을 소비하고 있었는 지 깨닫는다.









지하철 광고에서 보았다.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옵니다.

그 이유는,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얼마나 높고

넓고 깊고 맑고 멀고 푸르른가.


땅 위에서

삶의 안팎에서

나의 기도는 얼마나 짧은가.


어림도 없다.

난 아직 멀었다.

      

- 이문재 詩   [아직 멀었다]









.... 그랬다.


나도 아직 멀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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