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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의향기 Nov 29. 2024

겨울엔 바다지

연재는 숙제다


수능을 마친 아들은 요즘 <현장 체험학습>이라는 학교 방침에 따라 모처럼 만의 방학을 즐기듯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끔씩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떡진 머리에 헐렁한 파자마 차림으로 집 안을 배회하는 모습을 보면 벌써부터 웬만한 중견 백수의 그것에 꿀리지 않는 향기가 풍긴다.

한동안은 그렇게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내키는 대로 마음껏 쉬고 놀게 둘 참이다.

아내와 나는 아들 스스로 뭔가를 정하고 시작할 때까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기로 했다.



학업과 관련된 교육 과정은 이미 마무리되었고 졸업 전까지 학교에 나가야 할 일도 몇 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현장 체험학습>은 드문드문 출석해야 하는 그 사이사이에 길게는 열흘, 짧게는 4,5일동안 따로 등교할 일없이 자율적으로 지내는 일정이었는데 지난주부터 오는 29일까지가 그 첫 번째 기간이었다.


물론 명목 상 충족시켜야 할 요건은 있다.

기한 안에 각자가 원하는 특정 지역을 찾아 둘러보고 보고서를 작성하되, 반드시 보호자와 같이 찍은 인증사진을 첨부할 것.

녀석은 방문 예정지를 "속초 중앙시장"으로, 보호자를 "아버지"로 적은 체험학습 신청서를 담임 선생님께 제출했다고 했다.



그럼, 11월 29일 안에 속초를 갔다 와야 되는 거야?

… 응. 중앙시장에 들러서 아빠랑 사진도 찍어야 돼

근데 왜 하필 시장이야?

... 뭐, 그냥



녀석이 볼거리가 넘치는 속초 안에서 콕 찝어 중앙시장을 적어 낸 이유도 대강은 짐작 가는 구석이 있긴 하다.

지속적인 관광객 유입을 통한 지역 경제의 활성화 방안 모색, 또는 철마다 제기되는 이른바 바가지 논란을 극복하기 위한 상인들의 자정 노력... 같은 이슈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며 고민할 리는 없고, 그냥 순수하게 그곳의 시그니쳐 메뉴인 "닭강정"이 떠올랐을 테고 먹고 싶어 졌을 것이다.

닭강정은 속초에 갈 때마다 사 먹기를 거의 빼놓지 않는, 아내와 아이가 매우 애정하는 메뉴였다.


그래도 따지고 보면 뜬금없이 해남 땅끝마을이나 저 아래 통영, 거제 같은 곳을 목적지로 잡지 않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특한 일인가.

혹여나 그랬다가는 여유 있게 일정을 잡기도 애매했을 뿐 아니라 갈수록 귀찮아지는 장거리 운전 중에 수시로 투덜거리며 아이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가자. 인증샷 찍으러.

우리는 다가오는 일요일을 출발일로 잡았고 요즘 뜨는 “현지인 추천 맛집”에 대한 정보를 하나둘 수집하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얘기지만, 학력고사가 끝난 그 해 겨울의 어느 날, 고만고만하게 시험을 망친 두 친구와 작당해서 무작정 강릉으로 떠난 적이 있다.

지금의 아들 나이와 같았을 열아홉, 인생에서 어른과 동행하지 않은 첫 여행이었을 그때, 우리는 깜깜한 앞날에 대한 막연함으로 몇날며칠을 모여 머리를 긁적이다가 문득 수중에 있는 얼마 안 되는 돈을 각출해서라도 이 재미없고 암울한 동네를 잠시 벗어나 보기로 했다.


당시의 갑갑한 집안 분위기로 보아 미리 허락을 구한다고 한들 될 일도 아니었으므로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 누구에게도 이 비밀스러운 가출에 대해 알리지 않았다.

정작 문제는 나중에 집에 돌아와야 할 때였다. 하지만 뭐, 그래봤자 몇 대 맞기밖에 더 하겠나 싶은 근거 없는 배짱과 맷집이 스멀스멀 나를 부추기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친구들과 약속한 날 아침,

겉옷 안주머니에 *워크맨과 이어폰만 욱여넣은 채로 되도록 자연스럽게 집을 나섰다.

(*그 옛날 sony에서 발매한 휴대용 카셋테이프 플레이어)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굉장히 오랜 시간 덜그럭거리며 가다 서기를 반복한 끝에 마침내 강릉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아직 해가 남아있는 시간까지 넓디넓은 경포 해변을 마냥 두리번거리며 쏘다녔고 이따금 정신 나간 것처럼 괴성을 지르며 모래밭 위를 내달리다가 가빠진 숨을 내뱉으며 멈춰 서서 몰아치는 파도를 멍 때리듯 바라보았다.

추위는 매서웠고 어느샌가 바닷바람에 시려진 이가 덜덜덜 부딪히고 있었다.

계절이 인적 드문 겨울이었기에 망정이지 누군가 그런 우리의 행색을 주의 깊게 보기라도 했었다면 주저없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밤에는 무너질 듯 지붕 한쪽이 기울어진 싸구려 민박집에서 바닥이 새까만 양은 냄비에 끓인 라면과 함께 술을 마셨다.

비록 하나마나한 뜬구름 잡는 소리만 반복해 가며 취기에 물들어 가는 게 전부였지만 그 밤만큼은 이상하리만치 홀가분해진 해방감이 가슴 속 가득 차올랐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새벽녘에 이르러 친구 A가 방 한구석에 모아 둔 빈 맥주병들 중의 하나에 아슬아슬하게 오줌을 누고는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때마침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가 한참만에 돌아온 B는 뭔가 좀 아쉬운 듯 주변을 살피다 말고 하필이면 좀 전의 그 맥주병을 들어 꿀꺽꿀꺽 들이마셨고 이내 만족스러워진 얼굴로 A 옆에 누워 이블을 끌어 덮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좌식들, 아까운 술을 남기고 그러냐.








올해 초에 세운 우리의 목표이자 계획은 12월 중에 모든 입시 일정을 마치고 내년 2월쯤, 스페인의 여러 도시 위주로 가족 여행을 떠나는 거였다.

더없이 고단하고 예민한 시기를 무탈하게 버텨 준 서로의 노고에 감사해하고 방전된 몸과 마음을 “새로고침”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회가 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사실 난이도로 보자면 수험생 당사자에 비할 건 아니겠지만, 수험생 부모 노릇도 그다지 만만하지는 않더라.


하하 ㅋ






속초항 인근에서의 일출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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