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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의향기 Dec 06. 2024

아무 짓도 하지 않기로 해요, 제발

국민은 피곤하시다

한번 닫히면 좀처럼 열리지 않는 아들 방의 문이 스르륵 입을 벌리는가 싶더니

녀석이 종종걸음으로 와서 소파 위, 내 옆에 앉는다.

잠시 현실감을 놓쳐버린 얼떨떨한 기분으로 뉴스 속보를 보고 있었는데

아마도 같은 소식을 접하고 좀 놀란 모양이었다.



...아빠. 국회가 정부를 견제하고 그러는 건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냐?

그럼그럼. 제대로 안 하면 직무유기지

...근데 왜 그거 가지고 계엄을 선포하고 그래?

그래서 투표를 잘해야 하는 거야




생일이 1월인 아들은 어느덧 만 18세가 넘어 지난 4월의 국회의원 선거 때부터 어엿한 유권자가 되었다.

우리는 그날 아침 일찍, 서둘러 투표를 마치고 자주 가는 콩나물 국밥집에서 밥을 먹었다.




기표란에서 벗어나지 않게 잘 찍었어?

...응응

긴장되고 그러진 않았냐?

…전혀

아빠한테만 누구 뽑았는지 말해줘봐

...오! 노노







급한 술자리 약속이라도 있는 듯 순식간에 떠들어댄 계엄 선포의 변(辯)은 다시 봐도 아리송했다. 적격 하지 않은 공직자를 탄핵하고 국가 예산을 검토, 심사하는 것은 입법부의 당연한 책무이며 그런 일 하라고 국민들이 뽑아 세비 주는 것이 아니었던가.

권력의 분산, 견제, 균형.. 고등학생도 아는 민주주의의 작동원리를 일국의 행정수반과 그 한 줌 권력에 부역하는 자들만이 "반국가 행위"로 지칭해 가며 부정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미침 보고있던 "틈만 나면"(SBS 예능)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속보에 밀려 중단된데다가

삐뚤어진 욕망에 더해진 신념이, 광기로 발현되는 현장을 쌩 라이브로 목도하는 심정은 착잡했다.

그의 저 경박하고 정제되지 않은 언어들에게서 그가 가진 사고의 비루함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조명 탓일까, 아니면 화장 때문인가는 정확지 않지만

액자 같은 TV 화면 중앙에 오늘따라 번들거리는 그의 넓고 희멀건 이마가 시선을 끌었다.

만일 나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10초간의 초능력이 주어진다면,

지금 이대로 TV 패널을 타고 들어가 그 이마 한가운데에 딱밤 3대쯤 연달아 쥐어박고 싶은 충동이

급하게 따른 맥주 거품처럼 순식간에 끓어올랐다.




아빠가 또 출동해야 되나 봐

...그러게

우리 집이 여의도랑 가까웠으면 바로 나갔을 텐데

...(전혀 비장하지 않은 투로) 나도 그랬을걸?




그러고 보니 기시감이 든다.

2016년이 저물어 가던 겨울의 광화문은 춥고도 따뜻했다.

새어 나온 콧물이 인중에 담기는 줄도 모르게 추위는 아릿했지만

촘촘히 어깨를 맞붙이고 외쳤던 서로의 함성에서는 모락모락 입김이 피어났다.


그때 우리는 무얼 갈망하느라 그곳에 모였었을까.








국회의사당 이곳저곳을 비추던 카메라에 급기야 분주히 오가는 군인들이 잡히기 시작했다.


현역병으로 복무해 본 사람들은 단박에 알아챈다.

저들의 복장이며 장비며 무기들이 단순히 시민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의 자식이며 가족일 청년들을 적법한 근거도 명분도 없이 저 위험천만한 현장으로 내몰아

시민들을 상대로 총을 들게 한 자들은 반드시 응당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

설마 실탄까지 지급된 건가, 찡그려 초점을 맞추며 그들을 살피는데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여느 날과 같이 평온하게 흘러가던 이 밤에 헬기가 병력을 실어 나르고 작전차량이 도심을 가로막는 장면은 도무지 21세기 문명국가의 모습이라곤 믿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칠순을 바라보는 국회의장은 출입 통제를 피해 의사당 담벼락을 넘었다고 하고

곳곳에서 모여든 시민들이 군인과 경찰에 맞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내일 학교 가는 날 아냐?

...응

피곤하지 않겠어? 들어가서 자

...괜찮아. 할 일도 없는데 학교에서 자면 되지 뭐




아이는 여전히 불안한 듯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어느새 시간은 새벽 네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며칠 뒤에 있을 건강검진을 위해 이번 주만큼은 "무알콜 주간"으로 선포(...)했었는데, 뜬금없는 계엄령 소식으로 급상승한 울화를 진정시킬 방법이 없어 하이볼을 머그컵에 담아 연이어 석 잔째 홀짝였다.  



너랑 네 친구들이 앞으로 만날 세상은 그래도 지금보단 나아질거야

...(말없이) 끄덕끄덕




뉴스 속 전문가들은 국회의 의결 즉시, 대통령이 계엄 해제를 선포하도록 법률 상 명시되어 있다며 거듭 설명했으나 정작 당사자는 세 시간이 넘게 뜸을 들인 뒤에서야 억지로 끌려 나오 듯 아까 그 자리에 어슬렁 나타났다.


긴박한 목적을 위해 극도로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서만 국민의 기본권 일부를 제한하는 계엄령의 취지를 한낱 권력자의 정치적인 수단으로 훼손시키고, 위법적인 절차를 빌어 국가 전체를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한 그의 행태를 납득할 방법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장의 지표로 확인되는 대외적인 리스크 또한 단순히 수치로 환산되는 것, 그 이상일 것이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중략 ).. 바로 국무회의를 통해 국회의 요구를 수용하여 계엄을 해제할 것입니다.

다만, 즉시 국무회의를 소집하였지만, 새벽인 관계로 아직 의결 정족수가 충족되지 못해서 오는 대로 바로 계엄을 해제하겠습니다."


            - 2024.12.4. 내란 수괴의 대국민 담화 중에.



이런 중차대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간 타령을 핑계 삼는 모습에 실소도 아까울 지경이다. 달리 어떻게 저 사람의 의중을 헤아려야 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유시민 작가의 전언처럼 중증의 인지 장애로 인해 사리분별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문이 사실인 건지, 아직도 검사 시절 피의자를 발 아래로 내려보듯이 자신 외의 모두가 하찮게 여겨져서인지 그저 헷갈릴 뿐이다.


어쨌거나 마음 졸이며 우려했던 물리적인 충돌이나 그로 인한 사고가 없었음을 그나마 위안 삼으며,

두고두고 기억할 이 난감한 하루와 새벽을 닫는다.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전설처럼 떠도는 7,80년대 독재의 현장으로 잠시 다녀오기라도 한 것처럼

피로감이 눅눅하게 밀려들었다.





부디 아무 짓도, 더는 하지 마시라.

당신이 존경한다는 국민 여러분들은

덕분에 몹시도 피곤하고 쪽팔리시다.




#계엄령#내란#쿠데타#탄핵#형사소추#윤석열_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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