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던 날
반장이었던 나는 부반장 해솔과 친했다.
해솔은 반장과 부반장이 된 시점부터 장난스럽게 나에게 우호적으로 대해주었다.
첫 학급회의 때 "우리 호흡 잘 맞을 것 같은데?"라며 웃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렇게 해솔과 나는 빠르게 친해졌다.
시험 기간, 나는 해솔과 문자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유인이 나에게 던진 그 말과 오해를 풀고 싶다는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해솔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나 유인이랑 초등학교 때 같이 다녔거든? 걔 원래 그래. 쿨한 척하지만 오해 풀면 금방 친해져. 내가 도와줄게."
해솔은 자신만만하게 유인과 함께 놀러 가자고 제안했다.
"시험 끝난 기념으로 우리 셋이 영화 보러 가자. 내가 유인이한테 연락해 볼게."
며칠 후, 해솔은 엄지를 치켜들며 내게 말했다.
"유인이 오케이래. 이번 주 토요일 어때?"
그렇게 해솔, 유인 그리고 나는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정말 둘이 친했었는지, 해솔이 연락하자마자 유인은 알겠다며 같이 놀자고 했다고 한다.
학생이기도 했고, 영화비를 아껴야겠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조조 영화를 보기로 결정했다.
토요일 아침, 나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거울 앞에서 머리를 여러 번 다시 빗었다.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해솔을 먼저 만났다. 학교 밖에서 해솔을 만난 것도 처음이었다.
해솔은 후드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편하게 나왔는데, 나는 괜히 옷을 너무 신경 써서 입은 건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야, 너 오늘 왜 이렇게 단정해?" 해솔이 장난스럽게 물었지만, 나는 그냥 원래 이렇게 입는다고 둘러댔다.
잠시 후 유인이 도착했다.
긴 생머리를 뒤로 묶고, 베이지색 가디건을 입은 유인은 평소 교실에서 보던 모습과 조금 달라 보였다.
학교에서는 항상 교복이었으니까.
"안녕." 유인이 조용히 인사했고, 우리는 곧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서 유인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며 말이 별로 없었다. 해솔과 나는 자리에 나란히 앉았고, 유인은 우리 앞자리에 혼자 앉았다. 신경이 쓰였지만 나 또한 낯을 가렸기 때문에, 해솔과 나는 학교 이야기, 시험 이야기 같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영화관에 도착했다.
영화관 로비는 주말 아침임에도 사람들로 붐볐다. 팝콘 냄새가 진동했다.
"야, 팝콘 살까?" 해솔이 물었고, 우리는 콤보 세트를 하나 주문했다.
표를 뽑고 상영관으로 들어가기 전, 해솔은 나를 한쪽으로 불러 작게 속삭였다.
"너 유인이 옆자리 앉아. 내가 기회 만들어줄게."
"뭐? 갑자기!!??"
"너 유인이랑 친해지고 싶다며. 내가 도와주는 거야."
해솔은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고는 먼저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해솔은 나와 유인이 친해져야 한다며 자신이 맨 왼쪽에, 나를 가운데, 유인을 오른쪽에 앉게 했다.
선택한 영화는 최근 개봉한 스릴러물이었다.
어둠이 내려앉고 예고편이 지나간 뒤, 본 영화가 시작되었다.
이토록 영화에 집중이 안 되던 때가 없었다.
가족들하고만 보던 영화관에 친구들과 온 것도 처음이었는데, 그토록 다가가기 어려웠던 유인이 내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으니, 영화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유인의 반응만 계속 보게 되었다.
영화 속에서 긴장감 넘치는 음악이 흘러나올 때, 유인이 살짝 몸을 움츠리는 게 보였다.
팝콘을 집어 먹을 때 손이 가끔 내 쪽으로 왔다가 멈추곤 했다.
나도 팝콘을 집으려다가 타이밍이 겹칠까 봐 망설였다.
화면에서는 살인마가 주인공을 쫓고 있었지만, 나는 옆자리의 작은 움직임에만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유인이 가끔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끗 보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두워서 확실하지 않았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나 혼자 긴장을 많이 해서 온몸이 쑤셔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나는 영화 제목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햇빛이 눈부셨다.
"영화 어땠어?" 해솔이 물었다.
"응, 재미있었어." 유인이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나는 솔직히 뭐가 재미있었는지 잘 모르겠었다.
"나는 중간에 깜짝 놀라서 팝콘 떨어뜨릴 뻔했잖아!" 해솔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긴장되는 영화 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근처 분식집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여전히 유인은 말이 별로 없었고, 그냥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가끔 미소 지었고, 물어보는 질문에만 짧게 답했다.
"유인아, 너 떡볶이 매운 거 괜찮아?"
"응, 괜찮아."
"시험은 어땠어?"
"그냥 그랬어."
밥을 먹고 나와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샀다. 해솔은 바나나우유를, 나는 콜라를, 유인은 복숭아 아이스티를 골랐다. 우리는 음료수를 들고 천천히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야, 오늘 날씨 진짜 좋다." 해솔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때였다. 유인이 음료수 뚜껑을 여는데, 갑자기 손이 미끄러지면서 음료가 옷에 쏟아졌다.
"아..." 유인이 작게 신음했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다가 근처 편의점으로 달려가 휴지를 한 묶음 집어 왔다.
숨을 헐떡이며 돌아와 유인의 옷에 묻은 음료수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괜찮아? 많이 묻었어?"
"응... 괜찮아. 고마워." 유인은 당황한 듯 두 볼이 약간 붉어진 채로 대답했다.
해솔은 옆에서 "어머, 우리 반장님 참 다정하시네요~" 하고 장난스럽게 놀렸지만, 나는 그냥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서 그랬을 뿐이었다.
정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그냥 그날 유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유인에 대해 한껏 알아가게 된 것 같았다.
말은 많지 않지만 해솔의 농담에 조용히 웃는 모습,
길을 걸을 때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는 습관,
음료수를 마실 때 빨대를 살짝 씹는 버릇까지.
작은 것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 해솔은 들를 곳이 있다며 먼저 내렸다.
"조심해서 들어가!" 해솔은 손을 흔들며 버스에서 내렸고, 문이 닫혔다.
갑자기 둘만 남게 되었다. 버스 안은 조용했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면 돼." 유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응, 나도."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헤어지기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둘이 시간을 보내는 게 다시는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나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워낙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집을 데려다주는 게 매너라고 배웠어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괜찮아. 가까운데." 유인이 손을 저었지만, 나는 고집을 부렸다.
"그래도, 오늘 같이 놀았으니까."
결국 유인은 작게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걸어가면서 오늘 영화는 어땠는지, 같이 논 건 재미있었는지 물어봤다.
"영화... 무서웠어?" 내가 물었다.
"응... 조금." 유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나도... 좀 무서웠어." 솔직히 영화보다 옆자리에 유인이 있다는 게 더 긴장됐지만,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오늘 재미있었어?" 나는 다시 물었다.
유인은 별말 없이 그냥 웃으며 재미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그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진심인지,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너무 아쉽게도 유인을 데려다주는 길은 매우 짧았다. 횡단보도를 두세 번 건너고 나니 유인의 아파트 입구 앞이었다.
"여기야. 고마워." 유인이 입구 앞에서 멈춰 섰다.
"응... 조심해서 들어가."
"너도."
그렇게 유인은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돌아서서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오늘 함께 보낸 시간이 매우 좋았다고 생각했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 감정이 처음 들었다고 느낄 만큼, 가슴이 두근거렸다.
길을 걷는 발걸음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집에 돌아와서 유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재미있었어. 집에 잘 들어갔어?"
한참을 기다렸는데 답장이 오지 않았다. 혹시 내가 뭔가 잘못했나 싶어 계속 핸드폰을 확인했다.
30분쯤 지나서야 유인에게서 답장이 왔다.
"응, 잘 들어왔어"
나는 다시 물었다.
"근데 집 데려다줄 때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였는데... 내가 뭔가 잘못했어?"
한참 후에 답장이 왔다.
"아니야. 그냥... 좀 복잡했어"
"왜? 무슨 일 있었어?"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돼?"
"응, 물론이지"
나는 긴장하며 답장을 기다렸다.
"해솔이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래서 그 사이에 있는 게 좀 불편했어"
머리가 멍해졌다. 해솔이 나를 좋아한다고? 전혀 몰랐다.
"진짜? 나는 몰랐는데..."
"괜찮아. 네 잘못은 아니야"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오늘 재미없었어?"
한참 후에 답장이 왔다.
"아니... 사실은 나도 너를 좋아해"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유인의 메시지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불편하기도 하면서, 같이 있는 게 떨려서 영화가 사실 집중이 안 됐어.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
내 손이 떨려서 제대로 타이핑하기도 힘들었다. 유인이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니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진짜?"
"응. 나도 영화 내용 하나도 기억 안 나. 계속 네 생각만 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용기를 내서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해솔이가 나를 좋아하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너를 좋아해"
"나도"
나는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방 안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가 침대에 벌렁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너무 행복해서 웃음이 나왔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나는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이네?"
웹소설에나 나올 법한 진부한 말이었지만,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었다.
"응! 내일 학교에서 보자"
유인의 답장은 짧았지만, 그 한 글자 한 글자 안에 모든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첫 번째 연애가 시작되었다.
나는 핸드폰을 가슴에 안고 눈을 감았다.
왜 내가 유인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처음부터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냥 내 앞자리에 앉은 조용한 아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를 싫어한다고 한 그날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도, 쉬는 시간에 창가에 서 있는 모습도, 점심시간에 혼자 하늘을 바라보는 뒷모습도.
그리고 또래와는 다르게 사색에 잠겨 있고 생각이 많은 것 같은 그 아이가, 조용하지만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것 같은 그 아이가, 점점 좋아졌던 것 같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봄바람에 커튼이 흔들릴 때, "나는 하늘을 보는 게 너무 좋아"라고 말하던 유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렇게 유인과 나는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것은 내 인생의 첫 연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