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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내가 아니라고 한다. 나는 누구인고

by 달빛타기

인간은 몸(body)을 가지고 태어난다. 몸덩이는 한계를 지닌 너무나도 불완전한 존재이다. 늘 배고프다고 하고, 신경질을 내며, 자고 싶어 하고, 갖고 싶어 한다. 무언가에 결핍되고 무언가의 욕구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인간은 하나의 욕망덩어리이다.


마음은 몸에서 나온다. 몸의 결핍을 마음이라는 창으로 발현된다. 배가 고프면 배고픈 마음이 생기고, 갖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욕망의 마음이 된다. 마음은 몸의 언어다.

만약, 인간이 완전무결한 존재라면, 욕구없는 존재이고, 생로병사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간은 불완전한 상태로 나서 자라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


깨달은 선지식이 일관되게 말하는 바는, 몸이 내가 아니라고 한다. 마음도 내 것이 아니라고 한다. 결국 이런 질문이 남는다. 그러면 나를 이루고 있는 이 몸은 누구인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 마음은 또 누구인가.


이 몸덩이가 나라고 한다면, 나의 존재는 어디에 있는가. 팔에 있는가. 팔을 잘라보라. 몸이 두 개가 되었다. 어느 쪽이 나인가. 몸쪽이 나인가. 그러면 발을 잘라보라. 아직도 몸쪽이 나인가. 하체를 모두 자르고, 귀도 눈도 혀도 코도 잘라보라. 아직도 몸쪽이 나인가. 심장을 제거하고 인공심장을 달았다고 하자. 생명은 유지될 것이다. 자 이제 나는 어디에 있는가. 머리의 한쪽 부분을 제거하고 나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결국 내 몸의 모든 것을 하나씩 제거해도 나라는 존재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또, 이 몸이 내 것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소중한 몸을 우리는 죽을 때 가져가지 않을까? 저세상으로 간다고 하는데 이 몸은 땅속으로 흩어지고, 저세상으로 가는 존재는 이 몸덩이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저세상으로 가는 존재는 무엇인가? 또 이 세상으로 나를 이끈 것은 무엇인가? 단순히 부부의 교접으로 태어나서 한순간의 삶이 주어지는 생물학적인 존재가 나의 전부는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불교에서는 이 몸을 4대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4대란 네 가지 요소로 ‘지수화풍(地水火風)’을 말한다. 즉, 땅의 기운, 물의 기운, 불의 기운, 바람의 기운, 이 네 가지가 어떠한 인연에 의해 합쳐져서 인간의 몸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이 몸을 받을 때 4요소가 인연에 따라 형상을 갖게 되지만, 인연이 다하면 뼈와 살은 흙으로 돌아가고, 수분은 물로 돌아가고, 불의 기운은 세상의 온기로 돌아가고, 바람 기운은 바람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몸은 하나의 인연으로 잠시 맺어진 이슬과 같다고 말한다.



몸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은 마치 옷과 같은 거라서 시간의 흐름에 퇴색되고 퇴락할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영원성을 지닌 존재이다. 태초부터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해 갈 것이다. 영혼은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이라고 하기도 한다. 진짜 나라는 의미의 ‘진아(眞我)’라고 하며, 우리말로 이를 ‘참나’라고 하기도 한다. 또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신(神)’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 밖에도 나라마다, 집단마다, 다양하게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몸은 참나를 담는 그릇이다. 참나는 영원하고, 완전무결한 존재이다. 몸덩이가 내가 아니라 그 몸덩이 어디엔가 존재하는 참나가 진짜 나이고 실제 주인이다. 그런데 왜 인간은 참나의 존재를 조금도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그 이유는 무명 때문이다. 인간은 아직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미숙한 상태다.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간혹 영적으로 뛰어난 스승들이 나타나 미몽으로부터 깨어나는 가르침의 길을 제시하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 인간은 늘 육체적 단계, 즉 욕망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 무리를 가리켜 ‘중생(衆生)’이라 한다.


그러나 사실 내가 아님을 아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대단한 일도 아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눈을 감고 그저 생각을 끄고, 내 안에서 빛나는 참나를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그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인가. 과거와 미래가 없는 순간! 無의 상태에서 가만 나를 들여다보면 참나가 저렇게 빛나고 있는데….


참나를 발견하면, 당신은 완전한 상태가 된다. 그 참나의 영원성을 확인하는 순간 당신은 몸이 갖는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작용과 반작용, 이는 물리적 세상의 원리이다. 우리의 몸은 물리적인 존재이고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뒤따른다. 이를 불교에서는 인연법이라 한다. 원인이 있어 결과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원인에 의해 지금의 내 형상이 되었다. 지금 행하고 있는 수많은 작용은 원인이 되고 훗날의 결과도 만들 것이다. 몸덩이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그 인과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참나를 발견한다면 당신은 인과법에서 완전히 해방된다. 소위 깨달음,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은 당신이 지닌 몸의 건강함, 지위, 부유함 이런 것과 하등의 관련이 없다. 그저 영원한 존재를 깨닫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묻는다. 깨달으면 무엇이 좋은가?


깨달음은 거창하고 신묘한게 아니다. 전생을 보고 미래를 점치고 세상사를 손바닥 안에 놓고 보는 그런 신통한 재주가 아니다. 다만 깨달을 사람은 깨어난 삶을 산다. 무의식적으로 관성에 의존해 살던 삶에서 의식적인 삶이 되게 한다. 이것이 작은 차이 같지만 사실 엄청난 변화를 준다. 관찰자로서 나를 바라본다는 것, 일거수일투족 행위뿐 아니라, 당신에게서 일어나는 마음, 생각 등을 전지전능한 입장에서 지켜보고 관찰하는 의식적인 삶이 된다. 따라서 이제 나를 이루고 있는 내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닌 것을 알게 된다. 영원히 사는 존재가 진짜 나였음을 알게 된다. 완전무결한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몸덩이가 진짜 나가 아니었다는 것을, 마치 진짜 주인처럼 행세하며 살아왔던 관점에서 완전히 뒤바뀐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정견(正見, 팔정도의 하나. 제법(諸法)의 진상을 바르게 판단하는 지혜)을 가진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참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깨달으면 몸덩이의 결핍으로 생겨난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참나를 주시하면 결핍이 없기 때문이다. 참나는 시간의 선상에서 벗어나 있기에 결핍이 없다. 결핍은 시간이 존재할 때 그 의미가 있는 것인데 시간이 존재하지 않다면 결핍을 존재할 수 없다. 깨달은 사람은 업장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당연하다. 업장도 시간이란 관념을 먹고 산다. 당신이 현존한다면 업장도 없다. 각성한 사람은 욕구가 사라지면 미움도, 고통도, 공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으로부터 해방된다. 몸덩이나 마음이나 생각에서 나온 현상들이 실제가 아닌 거짓된 현상임을 알기 때문이다. 몸은 인과에 따라 병들기도 하고, 건강하기도 하겠지만, 몸이 병들어도 참나는 언제나 완전함으로 빛난다. 병든 육체에서 발생하는 고통이 참나에 의해 제어된다. 아무리 큰 고통이 와도 참나 안에서는 완전한 상태가 된다.

사회생활에서도 갈등이 없어진다. 인간사에서의 갈등은 언제나 결핍된 두 존재 간의 욕망이 부딪혀서 생긴 갈등이다. 깨달으면 이미 욕망이 없어지니 대립이 있을 수 없다. 그저 인과에 의해 주어진 상황을 덤덤히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깨닫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달리 방법이 없다. 인간사도 그렇지만 당신이 무언가를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그것을 향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지금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좌정하여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그리하여 진짜 나를 찾는 것. 생각해보라, 이 방법 외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어렵지도 않다. 단지 해보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았을 뿐. 내면을 들여다보는 방법을 어떤 사람은 ‘명상’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참선’이라 부르고, 어떤 사람은 ‘수행’이라 부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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