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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러

-부제: 인생 깨우침의 비법 고집멸도

by 달빛타기

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러~

손님이 줄을 잇는 요릿집 주인 할머니가 했던 말이다. 비밀스럽게 간직해온 평생 요리 비법을 누구한테도 알려주지 않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으면 하루종일 함께 일하는 며느리마저도 그 비법을 알려주지 않는단 말인가.


우리 인생사에서도 인생을 명쾌하게 갈파해놓은 말이 있다. 너무 소중해서 며느리한테건 누구에게건 섣불리 말할 수 없는 금강석 같은 한마디 말, 마치 이 말을 통하면 모든 인간사 문제가 풀려버리는 만능키같은 성스러운 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을 우러르며 4가지 성스러운 말이란 뜻으로 ‘사성제(四聖諦)’라 하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고집멸도(苦集滅(道)’란 진리의 말이다.


석가모니는 6년 고행을 버리고 마지막 목숨을 건 사투 끝에 보리수 아래에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正覺,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이뤘다. 무상은 지극히 높은 것이고, 정등각은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다.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부처가 된 석가모니는 깨달은 뒤 맨 처음 이것을 전하고자 하는 대상을 찾았다.


석가모니는 대오각성 후, 가장 먼저 자신에게 명상을 알려주었던 세 스승을 떠올렸으나 모두 돌아가신 것을 알아채고, 같이 수행했던 다섯 도반을 떠올렸다. 그들은 석가모니가 고행을 통한 수행법을 버리자 타락했다며 떠나버렸던 다섯 명의 도반들이었다. 석가는 그들이 머무는 녹야원으로 향했다. 처음에 강하게 거부하던 다섯 비구는 부처가 설파한 고집멸도에 대한 진리를 듣고 단 며칠 만에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평생 진리를 찾던 다섯 비구가 만법의 진리 고집멸도를 이해하고 깨달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고집멸도는 그들에게 있어 평생의 뜻을 풀어준 묘법 중에 묘법 아니던가. 한 사람씩 깨달을 때마다 부처는 그들과 함께 덩달아 춤을 추었다고 한다. 마지막 비구가 아라한이 되었을 때 석가모니는 이런 말을 남긴다. “이제 이 세상에 아라한은 여섯이 되었다” 그는 1명의 부처와 5명의 아라한이 태어났다, 라고 하지 않았다. 여섯명의 아라한으로 명명하며 깨달음에 이른자는 모두 동격의 경지임을 표방했던 것이다.


사성제는 깨달음을 얻고 맨 처음 법을 설하였다 하여 ‘초전법륜’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그 뒤로 승단이 생기고 수많은 논리와 말씀들이 덧붙여졌지만, 핵심 중의 핵심인 이 사성제로 모든 제자들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이 초전법륜은 마치 깨달음의 법문 중 머리와 같은 것인데, 사람들은 이 초전법륜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다른 수많은 팔만개의 경전과 조사들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인다. 팔만개의 경전과 조사들의 말씀은 결국 사성제를 풀이한 해석서에 불과하다. 결국 사람들은 너무 많은 말들안에서 길을 잃고 만다.


예를들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알려면 곧바로 대한민국헌법을 알고나면 해결된다. 나머지 헌법아래에 수만개의 법률과 시행령, 규칙, 조례, 판례 등은 그저 헌법에 대한 디테일한 해석서일 뿐이다. 따라서 헌법을 제 1순위로 공부해야만 정확히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알수 있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헌법을 무시하고 수많은 하위 법을 먼저 공부하기로 작심했다면 아주 먼훗날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정확히 알아갈 수는 있으나, 어느 세월에 그 많은 것을 공부할 것이며, 그러다 목적지에 가까이 가기 전에 길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당신이 수행자인데, 불교경전인 '금강경', '화엄경', 또는 '법화경' 등을 최고의 경전으로 삼고 공부하려고 마음먹었다면, 먼저 헌법과 같은 사성제를 먼저 알고 난뒤에 공부해도 늦지 않다고 말해두고 싶다.

단언컨데, 이 법문이 한 나라의 헌법같은 가장 중요한 법문이니 이법문을 통하지 않고서 인생을 알고자 하는 자, 진리에 접근은 요원할 것이라고 본다.


고집멸도란 무엇인가


사성제를 살펴보자.

첫 번째로 고성제이다. 부처는 인간 세상을 고해, 즉 고통의 바다로 보았다. 고통의 종류를 일일이 열거하였다. 인간에게 8고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중 4고는 생로병사이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이 그것이다. 나머지 4고는 원증회고((怨憎會苦,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구부득고(求不得苦,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의 고통), 오온성고(五縕盛苦, 다섯가지 요소로 뭉쳐진 존재에서 발생하는 고통) 등이다. 인간 세상을 정확히 갈파한 진리이다. 고통받지 않는 인간을 들은 적도, 만나본 적도 못했으니 이 통찰이야 말로 인간 세상을 정확히 갈파한 진리임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두 번째는 집성제이다. 앞서 말한 고통이 어디에서 왔는가. 부처님의 깨달음의 눈으로 보았더니 결론적으로 욕망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몽매함이 고통을 부르고, 그럼에도 항상 욕망에 집착하고 있으므로 인간은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 번째는 멸성제다. 원인을 정확히 알았으니 그 원인을 제거하면 열반에 이른다. 그 원인이 무명과 집착이었으니 이제 그 원인을 제거하라는 말이다. 즉 집착을 버리면 비로소 당신은 열반에 이른다. 열반은 니르주나라고 한다. 불이 꺼진 상태,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라고 한다.


네 번째는 도성제이다. 도성제에서는 어떻게 무명으로부터 벗어나고 집착을 버릴 것인가 방법론을 제시한다. 8정도가 그것이다. 정견(正見) · 정사유(正思惟) · 정어(正語) · 정업(正業) · 정명(正命) · 정정진(正精進) · 정념(正念) · 정정(正定)을 말한다.


사성제는 불교의 정수를 내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깨달은 부처의 눈으로 보았을 때, 세상은 낙원인가. 지옥인가, 라는 물음에 부처는 세상은 지옥과 같은 고통의 세계로 보았다.

이에 대해 오쇼는 이런 말을 남겼다. “붓다는 세상이 고통속에 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 세상이 아니라 그대가 고통이다. 세상이 아니라 삶이 고통이다. 세상이 아니라 인간이 고통이다. 세상이 아니라 마음이 고통이다”

아닌게 아니라 세상이 지옥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이 고통에 쌓여있다.

고통의 이유로 제시한 8고를 보면 인간의 삶은 정말 고통의 바다에서 헤엄치다 죽어가는 존재를 부인하기 어렵다.


부처는 깨달음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도 멸성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무명과 집착이 사라지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진리를 알고 집착을 버리면 당신은 각성한 자(覺者),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명쾌한가?

문제는 어떻게 집착을 벗어버려야 하는가, 이다. 부처님은 팔정도를 제시했다. 팔정도는 여덟가지의 중도를 표방한다. 8이란 숫자가 중요한게 아니다. 8정도이든 8만정도이든 핵심은 중도이다. 중도란 분별이 없는 중간에 임하라는 의미이다. 대표적으로 생사불이(生死不二)가 있다. 인간은 살아있는 것도 죽은 상태도 아닌 어느 한쪽에 치우쳐 볼수 없는 공의 상태라고 볼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꿈속에서 처럼 당신은 지금 한바탕 꿈을 꾸고 있다. 당신은 살아있는 존재인가. 죽은 존재인가. 팔정도의 핵심은 일체의 모든 법이 어느 한쪽 편에 서서 볼때에 그것이 진리라 할수 없다, 라고 한다. 중도사상은 불이(不二)사상이다. 그리고 불이상태로 머물수 있는 것은 당신의 불성(佛性)을 발견할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불성. 즉 참나는 영원성과 완전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 안에서 분별은 발생할 수 없다.

팔정도는 중도사상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실천방식이 아니라 체험의 영역이다. 그것은 생각으로 미치는 경지가 아니다. 오로지 당신이 체험해야 하는 영역인 것이다.


의문을 가질 것이다. 우리네 삶이 욕망에 쌓인 삶을 사는 것은 분명한데 어떻게 그 욕망의 집착을 없애란 말인가. 사는 것 자체가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세계가 욕망의 산물인 것을… 마음을 내려놓으면 된다고 한다. 해봐서 알겠지만, 말이 쉽지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집착을 없애는 단계에 이르러 꽉 막혀버리고 만다. 은산철벽이 가로막는다. 더 이상 한 걸음도 진전이 안된다.


고집멸도 재해석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은 무엇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숨겨져 있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경험이라고 하였다. 진짜 나(참나)를 발견하면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 참나는 한쪽 견해로부터 해방하고 집착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이다.


1. (고) 인간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세상은 고통의 바다이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2. (집) 고통의 원인을 보았더니 무명과 욕망이었다. 이것도 부인하지 못할 진리이다.

3. (멸) 무명과 욕망을 버렸더니 열반을 얻었다. 정말 그럴 것이다. 욕망을 버리니까 열반의 경지는 잘 모르겠지만 깊은 마음의 평화는 얻었다.

4. (도) 무명과 집착을 어떻게 해야 얻을 것인가. 팔정도는 깨달음으로 가는 방법론이다. 팔정도는 다른 말로 '중도'이다. 중도에 이르려면 참나를 발견해야 한다. 따라서 첫째, 명상하라. 명상 속에서 생각의 스위치와 마음의 스위치를 꺼버려라, 그러면 마음과 생각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참나를 발견할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순서를 두괄식으로 한번 해석해보자.


1. (도) 깊은 명상을 하여 참나를 발견하였다. 참나를 발견했다는 것은 당신이 진짜라고 한치 의심없이 믿었던 나라는 존재가 그저 한때 인연으로 맺어진 이슬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된다.

2. (멸) 그리하여 참나는 곧 그대를 열반의 상태로 이끈다.

3. (집) 참나는 한때 인연으로 생겨나온 몸, 마음, 생각 등이 무상하고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불꽃처럼 일어났던 집착, 욕망이 사그라든다. 그러니 무명의 상태도 벗어난다.

4. (고) 무명과 집착이 사라지고 나면 생로병사를 포함한 팔고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팔고는 거짓 나로부터 기인한 것이므로 영원한 불성, 참나를 찾는 순간 고통이 없어진다. 고통의 존재는 몸과, 마음, 생각, 시간이 존재했을 때 수반되는 그림자 같은 것인데, 열반적정이었을때 시간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누군가 예수에게 물었다. “신의 왕국에서 가장 특이한 현상은 무엇입니까?” 예수는 말했다. “그곳에 시간은 더 이상 없다.” 영원이란 시간없음을 뜻한다. 열반도 마찬가지이다.




논리로 깨달음을 설명하기는 참으로 어렵지만, 최대한 언어로 갈무리해보았다.

인간의 고통을 유발하는 집착은 다른 말로 말하자면 ‘소유’에 대한 욕구이다. 소유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시간이 있기에 의미가 있다. 시간이 없다면 소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즉 소유(집착)는 어제가 있고 내일이 있다는 전제하에 존재하는 욕망이다. 따라서 집착을 없애려면 내 의식 속에 있는 관념화된 시간을 지워야 한다. 이 순간만이 당신의 삶의 전부이다. 소유로 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소유와 무관하게 생명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앞서 말했던 화의 법칙에 의해, 현존하면 집착은 사라진다. 당신에게 주어진 이 순간만이 인생의 전부라면 거기에 무슨 집착이 있을까. 현존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스위치를 내려야 한다. 소유의 핵심은 생각이다. 생각은 곧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을 먹고 산다. 시간이 없다면 생각은 단 한 순간도 살지 못한다.

생각을 꺼버려라. 소유욕이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진다. 마음을 꺼버려라. 텅비게 된다. 그 곳에서 진짜 나를 발견하라. 너무나도 완전하고 영원한 존재, 진짜 나를 발견해보라.

집착은 몸이 주인일 때 발생하는 것이다. 몸이 마음을 발생하고 마음의 욕구가 생각으로 타오른다. 생각은 집착을 일으키고 인생은 고해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집착 ← 소유 ←생각 ← 마음

삶의 고해를 벗어나려면, 욕망을 버려야 하고, 욕망을 버리려면 생각과 마음의 스위치를 꺼야 한다. 그런 다음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

고집멸도의 핵심은 당신이 명상을 하고, 참나를 발견하여, 이 순간만이 사는 법을 알아 현존하여, 집착을 여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며느리도, 아들에게도 안가르쳐주는 비법 고집멸도를 간단 정리해보았다. 고통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방법으로 진실로 고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위대한 성자, 석가모니는 큰 깨달음을 얻은 후 사성제를 설파하였다. 사성제는 불교의 핵심적인 교리이자 세계관이다. 사성제는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를 말하며, 이는 고집멸도이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은 고통의 바다에 떨어진 존재(고)이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이 다름 아닌 무명과 욕망(집)이다. 이를 극복(멸)하기 위해서는 무명에서 벗어나야 하고 욕망을 버리면 해탈과 열반에 이른다. 무명과 그 집착을 버리는 길은 팔정도(도), 즉 참나 발견이다. 자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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