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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火)의 공식

by 달빛타기


진리는 항상 단순하고 쉽게 표현되야 한다. 나는 하나의 수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어느 날 불연듯 찾아온 깨우침을 하나의 식으로 만들면 좋지 않을까. 그렇다고 수리에 밝지도 못한 내가 왜 수식으로 표현하려 했는지 잘 모르겠다. 하물며 이 수식이 정의부터 오류라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옷처럼 계속 어긋난 채로 끝날 게 분명한데, 나는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서 이 수식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깨달음이 신비롭고 대단히 고차원적인 것이 아니고, 또 엄청난 고행과 수행을 통해야만 얻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고, 또 현대적인 언어로 말했을 때 이해의 폭이 넓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세상에 수식만큼 명쾌한 정의도 없지 않겠는가.


화(火)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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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수식에서 해당 요소들을 하나하나 풀이해보자.


화(火)

화(火)는 대표적인 감정 상태의 하나일 뿐이고, 실제로는 번뇌, 걱정, 슬픔, 공포, 초조, 불안, 증오, 흥분, 흥분, 쾌락, 좋은 감정, 애정…등등의 모든 감정을 통칭한다. 이런 감정을 통칭하여 ‘에고’라고 한다. 위 수식은 ‘화의 법칙’이기도 하고 ‘에고의 법칙’이기도 하다. 감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이 수식은 필수적이다.

화라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화는 생각과 마음에서 기인한다. 만약 생각과 마음이 없다면 화는 생기지 않는다. 수식대로라면 생각과 마음의 비례하여 화는 커지고 작아진다. 우리는 때때로 좋은 생각, 나쁜 생각으로 생각을 구분하지만, 사실 생각 자체가 허상이고 망상이다. 조울증(기쁨슬픔증)이란 병도 있듯이 기쁜 생각도 좋은 것이 아니다. 감정이 들떠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항상 반대급부가 존재한다. 긴 것이 있으면 작은 것이 있고, 밝은 것이 있으면 어두운 것이 있다. 빛과 그림자처럼 말이다. 감정의 상태도 좋은 것을 추구한 만큼 그렇지 못한 상황에 처하면 좋았던 감정의 폭만큼 나쁜 감정에 빠지게 된다. 시소의 놀이처럼 반대급부가 세상에는 반드시 존재한다. 애초부터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구별없이 감정 자체를 내려 놓아버려야 비로소 해결된다.


마음

마음은 현재 내 몸의 상태와 정신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반영한다. 마음의 값이 “0”일 수도 있으나 이는 마음을 온전히 내려놓았을 때 가능한 수치이다. 욕망, 갈애, 고통 등이 크면 클수록 값이 올라간다. 그 값은 “10”일 수도 있고 “10,000”일 수도 있다.

마음은 현재의 내 몸의 상태와 동조되어 있다. 배고프면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졸리면 자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사랑하는 이가 보고프면 그리운 마음이 들고, 내 몸이 아프면 신경질적인 마음이 싹튼다. 마음은 몸의 언어이다. 이렇듯 마음은 현재의 내 몸의 상태를 오롯이 대변한다.

때로는 마음이 먼저 생겨 몸을 움직이게 한다. 갑작스럽게 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몸에게 다그치기도 한다.

마음이 먼저일까, 몸이 먼저일까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황마다 다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거듭 말하겠지만, 마음은 사실 진짜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한다. 텅 빈 마음(“0”)이었을 때 우리는 에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생각

생각이 많으면 많을수록 에고가 많아진다. 생각은 과거나 미래를 먹고 산다. 생각은 곧 집착으로 발전한다. 생각은 번뇌와 동일어이다. 생각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며 그 집착의 강도와 생각의 수에 의해 값이 다르다. 숫자로 표현하면, “10”일 수도 있고 “10,000”일 수도 있다. 현재에서 멀어질수록 그 값이 크다. 과거나 미래에 의식이 가 있다면, 생각이 많아지므로 그 값은 올라갈 것이다.

생각은 과거나 미래의 시제가 있어야 존재한다. 과거의 생각, 미래에 대한 생각 등이 에고를 불러오고 집착에 사로잡히게 한다. 과거에 대한 나쁜 기억의 파편들이 현재의 나를 찌르고 아프게 한다. 또는 미래에 대한 집착으로 현재의 나를 옥죄며 다그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의 안 좋은 기억으로 트라우마적인 고통에 휩싸인다. 소위 ‘멍때리기 대회’처럼 아무 생각이 없을 때 비로소 당신은 에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현존(現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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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이란 ‘이 순간에 집중하여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현존(현재에 존재함)이란, ‘과거-현재-미래’라고 시간축 상에서 표현되는 그 ‘현재’가 아니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으니까 유사 용어인 ‘현재’를 사용할 뿐이다. 현존이란 ‘시간=0’인 상태이다. 시간이 멈춰진 상태, 즉 공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순간이란 말도 짧은 시간이라 오해할 수 있는데 시간의 개념이 아니다.

이 순간에 집중하면 할수록 채움의 空의 상태로 들어간다. 無와 空은 또 뭔가? 無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있는 것(有)의 상대적 개념이다. 空의 개념은 조금 어렵다. 空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실체가 있는데, 그 실체가 이 세계에서 작용을 하고 자극을 주는데, 실제로는 계속 변하므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얘기이다. 쉽게 꿈을 생각해보자.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현실처럼 생생하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지만 있고 실체가 없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 이것이 空이다.

이 순간에만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어제라는 것은 꿈을 꾸었던 지난 이미지와 같다. 내일은 머릿속에서 미리 가서 꾸는 꿈과 같다. 유일한 삶은 지금 이 순간 뿐이다. 현존해야 하는 절대적 이유이다. 이 순간에 완전히 머물렀을 때, 그 값은 “0”이 된다. 현존이 “0”이 되었을 때 비로소 火(에고)도 “0”이 된다. 현존한다는 또 다른 의미는 생각과 마음의 스위치가 off 된다는 의미이다

이 순간에 집중하면 할수록 과거의 생각, 미래의 생각, 현재의 마음 등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가 되고 궁극에는 空의 상태가 된다. 이 순간에 완전히 머물렀다면, 그 값은 “0”이 된다. 즉, 현존이 “0”이 되었을 때 비로소 火(에고)도 “0”이 된다.

위 공식에서 ‘화=(마음+생각)*현존’을 ‘화=(마음+생각)*시간’으로 바꾸어도 같은 의미이다. 즉, 시간이 “0”이 되었을 때 감정상태도 “0”이 된다.


火 = (마음+생각)×현존

위 공식이 의미하는 바는, 화는 생각과 마음에서 오는 것이고, 당신이 현존한다면 화는 완전히 소멸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에고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생각+마음)을 완전히 비워서 “0”으로 하던지, 다른 방법으로는 이 순간에 현존하는 것이다. 이 순간에 현존한다는 자체가 당신의 의식이 과거나 미래가 아닌 오직 이 순간(시간=0)에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생각과 마음을 덧셈으로 한 이유는 생각과 마음은 서로 다른 실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생각이 곧 마음인 경우도 많다. 마음에서 생각이 나오고, 또 생각이 마음의 모습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마음이나 생각을 구분하지 않고 생각=마음이라고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마음과 생각을 엄밀히 구분하는 것 또한 우리가 차차 해야 할 일이다. 그놈들의 실체를 분명히 알아야만 우리는 그들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체를 알아야 그를 분명하게 제어할 게 아닌가.

현존을 곱셈으로 한 이유는 현존하지 않으면 곱으로 화가 증폭되는 까닭이다. 반대로 현존하면 수식의 결과값을 “0”으로 만들 수도 있다. 과거에 덜 좋은 기억으로 지금의 화가 증폭되기도 하고, 분노심이 점점 불타오르게 되기도 한다. 현존이 현재에 존재하라고 하는 말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순간에 의식 모두를 모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생각과 마음)이 인간이 갖는 정적이고 의식적인 영역이라면, 현존은 행위의 영역이다. 식물은 현존한다. 마치 초가 타고 있듯이 의식을 과거나 미래에 두지 않고 이 순간에 오롯이 태워야 한다. 이 순간만이 당신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위 수식의 결과값을 “0”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생각과 마음을 “0”으로 하든지, 현존을 “0”으로 하든지 말이다.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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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식에서 두 개의 요소가 있다. 마음, 생각이 그 하나의 요소이고, 현존이 또 하나의 요소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비교를 해보기로 한다. 혹자는 비교하고 설명하는 것이 지극히 생각의 영역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나 어떻게 하겠는가? 진리를 물건처럼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잖는가. 저편으로 건너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이라 여겨주면 좋겠다.


표에서처럼 생각과 마음은 off했을 때 이상적인 결과를 얻는다. 생각과 마음의 영역은 의식의 영역이다. 의식이 하나의 저수조라고 하자. 그 저수조에 물이 가득 차 있다. 아래에 밸브를 열어 가득한 의식을 비워야 한다. 따라서 비움의 영역이다. 이는 하던 일을 멈추어야 한다. 몸은 곧 마음이기 때문이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마음과 생각을 계속 발생시킨다는 의미이다. 역동적인 상황에서 마음과 생각을 비우기가 여간 쉽지 않다.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이란 말이 있지만, 이는 상당한 수행을 거쳐야 하는 단계이고, 대개는 동적인 영역보다 정적인 영역에서 그 효과가 배가된다.


마음과 생각은 속성이 방어적이며 사후적이다. 생각은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난다. 따라서 일어난 생각과 마음을 방어적으로 스위치를 내리는 것이고 이는 사후적 조치라 할 수 있다.


수식에서의 이상값은 “0”이다. 그래야 화(에고)의 결과가 “0”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과 마음은 시간의 영역에 속해 있다. 왜냐하면 생각과 마음이 시간, 즉 과거와 미래를 먹고 살기 때문이다.


현존은 on했을 때 이상적인 결과를 얻는다. 현존은 행위의 영역이다. 현존은 간화선의 화두처럼 on 상태가 되어야 한다. 마치 깜깜한 방에 전등이 켜듯이 화두를 밝혀야 한다. 현존은 텅 빈 방에 불을 켜는 것과 같다. 따라서 채움의 영역이다. 채움이지만 고정된 실체가 아니므로 空의 영역이다. 현존은 당신이 어떤 일을 하던 중이라도 얼마든지 실행할 수 있다. 현존의 속성은 공격적이며 사전적이다. 마음과 생각의 빈자리, 즉 無의 자리에 이 순간으로 채워 넣는 것이다.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채워 넣는 것이며 이는 사후가 아니라 사전적 성격이 있다. 수식에서의 이상값은 “0”이다. 당신이 현존한다면 화(에고)의 결과값은 “0”이 된다. 현존에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공간만이 존재한다. 이 순간이란 시간에 속한 것이 아니다. 시간을 초월한 개념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수학엔 완전히 백지장이다.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밖에 모른다. 그마저도 계산기를 여러 번 두드려야 한다.

이럼에도 내가 발견한 이 귀중한 진리를 한 줄의 공식으로 전하고 싶었다. 내가 발견한 깨우침에 대한 한 줄의 정의를 위해 이렇게 공식을 빌었지만, 수학자들이 보기에는 어설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겉모양보다 그 내용을 살펴 보아주면 고맙겠다. 이 공식은 수리적인 수학의 영역이 아니라 지극히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표현했을 뿐이다.

이곳에서의 결론은 하나다. 우리 모두 생각과 마음의 스위치를 오프하고, 현존하여 에고로부터 벗어나자! 그곳에 이르기 위해 제시하는 단 한 가지는, 명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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