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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동윤 May 26. 2022

1.

대안은 직진 뿐이다. 행동은 생각을 잡아먹는다. 행동은 노동이고 노동은 열매를 맺는다. 수능이 끝나고 처음으로 아르바이트 생각이 들었을 때. 일일 알바를 하고 있던 친구에게 도움받아 홀 서빙을 하고 시급 8,000원을 받았다. 세상에 무지한 고3에게 만만한 건 서빙이다. 출근복으로 흰 와이셔츠와 검정 슬랙스를 입고. 아빠 엄마 구두 가득한 신발장 앞에서 흰색 양말에 아빠의 검정 구두를 신었다. 어린 발은 구두를 담기에 꼭 손가락 한 마디가 모자랐다. 발 뒤꿈치에는 언제나 핑크색 물집이 자기만의 방을 주장한다. 퇴근 할 때에 흰 양말에 난 붉은 점은 욕심의 방이 범람하며 남은 잔해다. 몸은 지쳐 늘어졌지만 통장에는 + 기호가 붙었다. 노동 후 씹는 과육에서 단내가 났다.


노동은 또한 불변의 것이 아니어서 다음 스텝이 있다. 계단을 오를수록 더 높은 숫자의 + 기호와 다음 스테이지를 향한 가능성이 부여된다. 홀 서빙 알바를 발판 삼아 레벨 업한 나는 기업의 프로모터가 되어 중국인을 상대한다. 일은 레벨 업 한 만큼 어려워진다. 에이전시 소속으로 불려나간 자리에서 처음 만난 직원에게 내용을 인수인계를 받는다. 서빙이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시계의 톱니라면 프로모터는 그 시계를 그럴듯하게 감싸는 포장지다. 처음은 향수였고 마지막은 핸드폰이었다. 기업 이미지 향상을 위해 웃는다. 고등학생 때 하도 웃음 짓는 게 어색해 '나라는 인간은 웃음을 가식으로 짓는 사람인가' 라는 명제에 심각하게 고민했던 나의 고민은 사춘기 소년의 몽상일 뿐이었다. 해야하면 해내야 했다.


웃음 파는 일로 돈을 모아 카페를 차렸다. 한 계단 오른 셈이다. 노동이 요구하면 언제나 나는 그것을 해냈다. 그리고 더 높은 임금을 얻을 수 있었다. 시향지에 웃음을 섞으면 돈이 되고 커피에 관심을 더하면 단골이 된다. 노동은 n차 수열이다. 무인도에 번식력 강한 두 마리 토끼를 방생하는 것과 같다. 결과와 부수적인 기회들이 생겨나는 마법적인 매력은 시간과 교환할 만큼 값져 보여서 나는 그 일을 했다. 수중의 유일한 패가 시간 뿐이었기 때문이다. 카페를 경험한 나는 다른 형태의 노동을 기획한다.


시간을 지키기 위해 노동의 방식은 진화한다.


2.


시작에 앞서 겁을 먹는다. 여동윤은 겁쟁이다, 라는 언제나 참인 명제가 있다. 하지만 막상 돌이켜보면. 지리멸렬한 현장에 빠져 들었을 때에는 단숨에 키를 움켜쥐곤 했다. 수세에 몰려야 한 방을 날리는. 그런 위기형 인간인 것이다. 전학 간 학교에서의 첫 날. 영화의 한 장면처럼 교탁 앞으로 나가 선 긴 남자는 떨리는 음성으로 자기소개를 하고 새로운 지역, 새로운 학급의 새로운 짝궁을 만났다. 그 시절 전학생이란 신분은 첫사랑의 호기심을 두드리곤 한다. 큰 키와 순둥한 외모보다야 낯선이에 가산점이 붙었을 것이다. 신비함과 우연의 도움으로, 세 번째 학교에서 나는 첫 여자친구가 생겼다. 우연. 퍽 곤란한 상황에 내던져졌다.     


때는 학급 봉사활동이 있던 날이다. 우리 반은 안양천에서 커다란 비닐 봉지에 공원 쓰레기를 채우는 과제를 맡았다. 교복을 벗어 던지고 제일 맘에 드는 그 옷을 입을 수 있는 날이다. 가장 친한 친구는 경주에서 올라온 C였는데 그는 늘 새로운 이벤트를 갈구했다. 자신 주변 사람들이 가까워져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간다면 행복을 느끼던 순수한 친구였다. C는 어느날 전학온지 얼마 안 된 내게     


"우리 반에서 누가 가장 이뻐?"     


라고 물었고 순진한 나는 K라 답했다. 대답은 씨앗이 되어 안양천에서 발아했다. C는 내가 자리 비우기를 노려 계획을 진행했다. 같은 반 아이들을 선동해 몰래 카메라 판을 짠 것이다. 흐름은 이렇다. K와 그녀의 절친들에게 전학생이 K에게 고백할 계획을 세웠다는 소문을 흘렸고. K는 말 몇 번 나눈 적 없는 전학생이 그럴 리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때는 전학간지 1개월이 막 지날 때였다. 간혹 눈 마주치면 수줍게 눈 내리며 "안녕" 인사한다던지 몇 번의 문자가 쑥스런 대화의 전부였다. 하지만 C의 추진력은 모든 경우의 수를 뛰어넘었다. 각반에 한둘씩 존재하는 입 가벼운 애들을 동원해 이야기에 살을 붙이니. 결과는 뻔했다.     


그때 나는 선생님 눈을 피해 쓰레기 줍는 척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달려왔다. 그중 입 가벼운 애가 속삭였다. 몰래 카메라를 하는데 급하게 와 달란다. 내가 주인공이였다. 배역이 생겼다. 그 시절 전학생에게 관심은 좋아요와 같아서 나는 헤벌쭉하게 진앙지로 향했다. 저 멀리 K가 보였다. 아이들에 섞여 있지만 왠일로 K는 내 눈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를 주위로 동심원을 그리며 모인 아이들은 KO를 바라는 콜로세움 관객의 눈으로 나의 모든 걸 좇았다. 나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가 눈을 맞춘 채로 다가왔다. K가 물었다.     


"너 나 좋아해?"     


등줄기로 찬 땀방울이 흘렀다. 머리가 하얗다. 모든 정보가 희게 연소되어 날아가 표정관리를 할 수 없는 내 표정은 분명 괴이했다. 무너진 전학생의 얼굴은 반 아이들 전체에게 보여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털었다. 답변을 갈구하는 K가 있다. 낯선 이 상황이 퍽 민망한 듯 볼이 붉다. 마흔 개 얼굴이 씬의 클라이막스를 기대하며 나를 향했다.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 함정에 빠지거나 혹은 전복시키거나.      


"응 좋아해. 우리 사귀자."     


일동 환호. 이제 모든 시선은 가엾은 K에게 향했다. K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두 사춘기 소년 소녀는 군중 사이 오직 둘만 존재하는 듯 눈을 맞췄다. K가 핸드폰을 꺼냈다. 그 기기로. 우리는 면전으로 나눈 대화보다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 둘 대화에 가장 익숙한 도구로 K가 답했다.      


"좋아"     


내게 들이민 문자 창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파도에 허우적대면서도 사선으로 갈라 들어가는 서퍼의 담력이 나에게 있다. 그것은 불현듯 뛰쳐나온다. 상황에 던져져야 나오는 일종의 생존 본능이다. 막다른 데 몰려야 초인적인 힘을 출산한다. 더 많은 삶의 현장에 나를 내던져야 하는 이유다. 메를로-퐁티는 저서 "몸과 살"에서 말한다. 삶은 뻗을수록 확장한다. 원치 않는 환경에 노출시키고 실컷 깨져야 성장이 따른다. 어릴 적 나는 그 경험으로 어렴풋이 배웠다. 10대의 나는 진짜 용기로 상황을 전복시켰지만 20대의 나는 자꾸만 가짜 용기를 내민다. 허연 시인의 시 십일월처럼,     


늙고 좋은 놈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젊었을 때만 좋았다.     


젊었을 때가 좋았다. 몸으로 부딪치고 얻은 불확실성의 대가도 체내에 데이터로 쌓여 나는 행동에 앞서 자꾸만 생각한다. 여전히 젊은 나는 가짜로 한탄한다. 가장 아름다울 때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거짓을 뱉는다.


3.

우연히 들어간 책방에서 시인을 만났다. 시인을 만난 건 처음이다. 나는 시인에게 시집을 추천해달라 하였다.


반백발의 시인이 안경을 고쳐쓰더니 어떤 시인을 좋아하냐 되묻는다. 앉았을 땐 등이 굽어 작아보였지만 일어서니 제법 키가 컸다. 그의 이름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의 커다란 눈알에 조용미와 최승자 그리고 한강을 좋아한다 하였다. 가라앉은 담담한 목소리를 좋아하는군요, 시인이 답했다. 연한 참나무 책장에는 번호 별로 깔끔하게 시집이 나열되어 있었다. 시인은 영화 트럼보  트럼보보다 굽은 어깨로 자신의 눈높이보다 높은 곳에 꽂힌   권을 1/3 꺼내며,


"읽어보시죠."


하였다. 시인이 꺼낸 다섯   마음에  드는 시집은 없었다. 그가 책등 끄트머리를 집어 꺼내면 나는 책을 꺼내 몇 장 훑고 밀어 넣었다. 마침 김뉘연이라는 시인의 책이 따로 빠져 진열되었기에 돌아가려는 그를 잡고 물었다. 김뉘연 같은 시집은 없을까요? 바다 같은 바다는 없을까요, 라는 투의 질문이 귀여웠는지 시인 코를 긁적이며 잠시 고민하더니    꺼내주었다.


"제 시는 여기 있어요."


이번에 꺼낸 책들중 당신 자신의 책이 있었다. 시인의 시집을 찾았다.   훑고 그 책을 결제. 배려는 아니고, 뭔가 나와 결이 맞다고 느꼈기 때문이다(시집을 읽고는 더더욱이 그랬다).


시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계산대 앞에 앉았다.  권의 시집만큼 시인에게 질문할  번째 기회를 얻었구나, 생각했다. 실제로 시인을   처음었이기에. 순수하게 품어온 질문을 꺼내고 싶었다. 신경질적으로 포스기를 눌러대는 그에게 물었다. 시집을 엮을  선정하는 시의 기준이 있나요. 시인은    재밌다는   얼굴을 쳐다보았고 적확한 단어를 고르려는  신중했다. 천장을 한참 쳐다보던 시인이 입을 열었다.


"시를 선정한다기 보다 무얼 뺄 지 고민해요. 15편의 시를 쓰는데 15일이 걸리는 시인을 믿지 않아요."


1년 단위로 살아남는 소수의 시. 책을 엮을 때면 고정된 상태에서 그 자체의 완결성을 위해 소거한다. 전체를 위한 부분을 덜어내는 과정.


결제가 끝났다. 나는 시인에게 감사하다 인사하고 곧장 내려왔다. 아슬아슬한 나선형 계단에 미끄러질까봐 아래를 보고 걸었는데 멀리서 시인의 힐긋거림이 느껴졌다.


-로 +를 만든다. 디터 람스의 슬로건 "Less is more"가 떠올랐다.


4.

시인이 있던 책방은 2층. 1층 역시 책방이다. 혜화동에 위치한 이곳 서점은 다소 독특한 내관을 취했는데 가운데 달팽이 모양으로 용솟음치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시인이 있는 책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다. 2층에는 시집이 있다면 1층에는 시집을 제외한 책방지기가 직접 큐레이션을 한 소수의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영역을 가른 표기가 큰 단어로 적혀 눈이 편했다.


1권 [오디션에 떨어지고 카페를 열었다]의 다짐대로 커뮤니티를 짓는 중이다. 시작은 조촐한 나의 지하 작업실에서. 글쓰기, 그림 그리기 등으로 나를 꺼내는 작업을 준비한다. 꽤나 오래 전부터 글쓰기를 해왔다만 배움이 있기 전 글쓰기란 한글을 배우지 않고 유식한 척하는 아이와도 같아서 독자에 대한 배려와는 거리가 멀었다. 가르침을 위해 배운다. 작법서를 탐하고 온라인 강의를 모으고 그들이 말하는 공통분모를 내 것으로 써먹으려 시행착오를 겪는다. 쉽게 익혀지지 않는 배움의 속성 탓에 갈증이란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마실수록 더해져서 나는 또 작법서를 탐한다.


작은 책방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작법서를 찾는다. 친절한 책방지기가 표기한 글쓰기 파트로 직행한다. 동행한 친구가 속이 상했을 만큼 여러 권의 책을 훑었다. 눈치가 보였지만 커뮤니티 생성은 눈앞에 닥친 이벤트기에 일단 탐독에 불이 붙으면 쉽사리 불꽃을 저지할 수 없다.


오디션으로 살며 배운 것은 인생은 비딩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배운 게 그뿐이라 책을 선택할 때에도 나는 나를 채점하던 감독님처럼 4단계 오디션을 본다. 제목은 그중 1차 서류 전형이다. 그것은 배우의 프로필처럼 첫인상에 당락이 구분된다. 통과하면 그 책은 꺼내져 자신의 표지를 자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2차 전형인 목차는 제법 꼼꼼히 보는 편이다. 출연했던 작품이나 특기 등의 정보값이 이에 해당되겠다. 나열된 꼭지들의 제목이나 구성에 궁금증이 생기면 3차로 넘어간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원에서 배운 속독으로 책 반절을 훑는다. 배우들이 함께 참고한 맛뵈게 연기영상이나 독백이 이에 해당하겠고 그렇게 4차 최종 면접으로 넘어온 책들은 알라딘 평점을 참고한다. 4차로 넘어온 책은 대부분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긴다. 언젠가 읽을 책들. 언젠가 함께 일하고 싶은 배우의 아프게 남은 이름들.


두 권 중에 가장 표지가 맘에 드는 책을 골랐다. 나의 단어로 쓴다는 제목에 알맞은 목차가 나열되어 있었다. 책은 포장되어 읽을 수 없었다. 3차를 건너 뛰고 4차로 넘어갈 수 밖에 없는 변수가 생긴 것이다. 매력적인 표지의 쉽게 때 타는 종이 재질 탓에 밀봉한 것 같다. 연약하면 아름답고 아름다울수록 보호 받아야하고 보호 받을수록 신비롭게 포장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표지에 힘 실은 이유는 있었다. 프로가 작정하고 감춘 과육을 알아볼만큼 삶의 깊이가 없는 나 같은 사람은 겉모습에 매료되어 책을 고른다. 그리고 기대로 들떠 책을 핀다. 영 맞지 않는 결에 터져 나오는 한숨을 먹어가며 책장을 넘긴다.


지면 위로 단편적인 얼굴들이 떠오른다. 고작 몇 번의 만남으로 나라는 초짜 배우를 선택해 낭패본 감독의 얼굴이다. 당신도 멍청한 연기를 꺼내 보인 나를 등지고 같은 한숨을 뱉었으리라. 그래도 사고가 있어도 일단 프로덕션이 시작되면 영화는 만들어야 한다. 캐스팅 또한 감독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을 것이다. 어린 내게 티내지 않은 그 마음들을 생각하며. 터져나오는 울음을 담배로 눌렀을 당신들을 떠올리며. 오늘의 나는 자명하게도 그들 실패의 책임으로 태어났다.


5.

그래서 내 안에 사랑을 채워야겠다 생각한 것이다. 예측 불가능성을 안은 채 행동하기로, 기나긴 이성의 늪에서 헤엄쳐 나오기로.


잠 못자는 와중에도 사랑을 지켜온 친구에게 가 물었다.


"일이 바빠도 사랑이 필요하다 생각해?"


친구가 답한다.


"바쁠 때일수록 사랑을 해야지."


구태여 이유는 묻지 않았다. 오늘의 내 식대로 해석을 섞는다.


그래 사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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