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나는 흰 눈밭을 걷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풀뿌리 하나조차 없는 흰 동산.
꿈이라는 걸 눈치챈 것은 맨발로 눈을 밟고 있는데 발이 시리지 않아서, 지긋지긋한 비염이 도지지 않아서.
현실이었다면 폐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공기였겠지.
꿈속에서 한참을 혼자 걷다 보니 조그만 발자국이 보였다.
동그란 모양의 발자국.
누군가 손가락으로 폭폭 눈길을 찍어 만들어 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발자국을 따라 걷고 걷다 그 길의 끝에서 누군가 쭈그려 앉아 있는 게 보이는 순간.
'... 아 일어나. 집에 가자.'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몇 시야? 나 언제 잠들었지?"
"가게 닫을 시간 지났어. 네가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도저히 깨울 수가 없더라. 좀 잤어?"
"응 엄마 덕분에 오랜만에 마음 푹 놓고 좀 잤다. 고마워. 얼른 집에 가자 할머니 뒤집어지시겠네."
"그렇게 자는 잠이 달아. 할머니한텐 가게 조금 늦게 끝났다고 말씀드렸어. 뭐 먹고 싶어?"
"엄마는 하루종일 요리했으면서 또 음식을 하고 싶어? 그냥 우리 집에서 배달시키자. 일단 집에 가."
"그렇지만 너희 할머니가..."
"일단 가. 십 년 만에 본 손녀딸인데 저녁밥 안 차린다고 경을 치시진 않겠지."
엉거주춤 내 손에 끌려 나오듯 가게를 빠져나온 엄마는 더 야위었고 더 자그매져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자신만만하게 집을 향하고 있었지만 나 역시 할머니와의 대면은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손에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엄마에게 들킬 것 같아 잡은 손을 은근슬쩍 내려놓고 집으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감각.
집이 가까워질수록 누군가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던 마음이 되살아 나는 것을 느끼며.
우리 집(엄밀히 따지자면 할머니 댁)은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 4층 가장 끝 집이었다.
낡은 엘리베이터가 있긴 했지만 4층이라는 어중간한 높이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게 더 싫어서.
그리고 최대한 집에 천천히 들어가고 싶어서 난 주로 계단을 이용했다.
계단 난간에 묶여있는 2층 쌍둥이들의 자전거, 안 쓰는 잡동사니들, 화분들, 아랫집 아저씨가 몰래 피운 몇 개의 담배꽁초들.
오늘은 엘리베이터가 1층에 와 있었다. 하지만 엄마도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계단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탁. 탁. 탁. 탁.'
우리는 말없이 계단을 올랐다.
살짝 숨이 턱끝까지 오르기 직전. 4층에 도착했다.
4층 복도 맨 끝. 가장자리가 녹슨 현관문 정중앙에 붙은 십자가 아래 사랑이 가득한 집이라 적힌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정말로 사랑이 넘치는 집은 이런 걸 붙일 필요가 없을 텐데.
"저희 왔어요."
엄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벼락같은 할머니의 호통이 들려왔다.
"가게 그 잘난 거 해서 얼마나 벌겠다고 시어미 밥을 굶기고 지랄이냐!"
정말 정정하시네. 나이는 나만 먹었나.
"네네 시간 늦었으니 조용히 말씀하세요. 옆집까지 밥 못 먹겠어요."
뒤따라 온 나를 뒤늦게 발견한 할머니의 눈이 커졌다.
저런. 아직 시력도 좋으신가 보네. 저러다 할머니 눈이 빠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즈음.
"아주 오늘 날을 제대로 잡았구나. 넌 이 집구석에 뭐 볼 일 남았다고 기어들어와? 넌 니 잘난 맛에 사는 년 아니냐. 왜 느이 몫으로 남겨둔 유산이라도 따로 있을까 봐 들러봤냐? 손녀라고 하나 있는 게 십 년 넘게 소식 끊고 살다가 왜 갑자기 쳐들어와서 사람 속을 뒤집는지. 그럴 거면 사내놈으로 태어나기라도 할 것이지. 무슨 계집애가 여기저기 적 못 두고 사는 반푼이 인지. 꼴도 보기 싫어 내 집에서 썩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