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슬픔을, 상처가 상처를 덮으며 서로를 보듬는 최은영 <밝은 밤>
"대접 어딨냐?" / 내가 하나 있는 대접을 꺼내서 싱크대 위에 올려놓자 할머니가 대접을 물로 한 번 헹구고는 보온병에 든 것을 옮겨 담았다. 전복죽의 고소한 냄새가 부엌을 가득 채웠다. 지는 해의 끝자락 빛이 기다랗게 거실을 타고 부엌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그 빛이 할머니의 손과 죽 위에도 내려않았다. 허기가 졌다. 나는 뜨거운 죽을 식혀가면서 허겁지겁 먹었다. 할머니의 다른 음식처럼 간이 조금 셌지만 레토르트 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맛이 깊었다. (175쪽)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14쪽)
"삼촌이 날 무시했다고? 날 가장 무시한 사람은 너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넌 항상 내 인생을 부정했어." / 엄마가 소리치듯이 그렇게 말했다. (2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