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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승 Feb 25. 2022

엄마와 나를 위로하는 할머니의 백년 라떼 이야기

슬픔이 슬픔을, 상처가 상처를 덮으며 서로를 보듬는 최은영 <밝은 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결혼하고 처음 맞는 명절을 2주 앞두고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결혼하고 첫 명절인데, 시댁 먼저 갔다가 어른들이 보내주실 때 친정에 와야지. 너무 늦어지면 다음 날 와도 되고." 

나는 말했다.

  "다음 날 와도 된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명절 당일에 친정에는 안 가도 된다는 거야?"

  "오지 말라는 게 아니라, 너는 이제 결혼을 했으니 당연히 시댁 먼저 갔다가 일정 봐서 친정에 와야지."

  "엄마가 명절 때마다 명절 당일에는 할머니댁 가고 다음날 친정 갔다고 나한테도 그러라는거야? 엄마는 그렇게 살아서 좋았어?"

  "좋았다는 게 아니라 그게 당연한 거야. 엄마 말 들어."


  시부모님, 친정부모님을 한 번씩 초대해서 신혼집 집들이를 하려고 일정을 잡을 때도 엄마는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는 아무 때나 괜찮으니까 시부모님 먼저 초대해."

  "시댁에도 괜찮으신 날짜 여쭤볼 거니까 일단 엄마가 좋은 날을 말해."

  "그럼 시댁에 먼저 여쭤보고 난 다음에 다시 얘기해. 음식은 차리기 힘드니까 시부모님 오실 때만 한 번 하고 우리끼리는 그냥 시켜먹어도 돼. 요리도 잘 못하면서 두 번 고생하지 말고."

  "엄마, 왜 자꾸 무조건 시댁 먼저야? 그리고 난 엄마, 아빠한테도 내가 직접 차린 음식으로 같이 먹고 싶은데 왜 시부모님한테만 차리래? 그리고 어차피 남편하고 같이 준비하고 같이 차릴 건데 엄마, 아빠 올 때만 배달 음식 시키는 거 진짜 이상해."

  "너는 너 힘들까봐 한 말을 왜 꼬아서 들어? 너도 사위도 고생하지 말라는 거지. 시부모님 오실 때 드실 국은 엄마가 끓여다줄까? 니가 한 번 더 끓여서 내놓기만 하면 되게."

  "엄마, 진짜 왜 그래? 그럼 그냥 양쪽 다 시켜먹을래."

  "시부모님 집들이한다고 초대해놓고 배달음식이 말이 되니?"  

  "엄마 올 때만 배달음식 시키라는 건 말이 돼? 그리고, 시부모님 음식까지 엄마가 왜 해 줘?"

  "너 그렇게 자꾸 하나씩 따지고 살면 못 살아. 시댁에 잘해야 남편하고도 사이가 좋은 거야."


  남동생보다 예쁨 받는 장녀로 자란 내가 결혼을 하고 엄마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서 혼란스러웠다. 학창시절 성적도 제법 좋고 안정적인 직장을 얻은 딸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던 엄마가, 한 번도 여자라는 이유로 뒤로 물러서거나 손해보도록 한 적이 없던 엄마가 왜 그런 답답한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쇼핑을 하다가 물건 값이 잘못 되거나 부당한 서비스로 손해를 보게 되어 컴플레인을 할 때, 직장에서 옳고 그른 일처리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질 때에도 엄마는 우리 딸 똑똑하다고 신이 나 했었다. 그런 엄마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짜증을 내면서 전화를 끊어버리고 한 번도 제대로 돌이켜 생각해보지 않았던 엄마의 삶을 떠올렸다. 딸에게는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주던 딸바보 아빠의 얼굴에 엄마에게는 가부장적인 남편으로서의 모습이 겹쳐졌다. 손주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셨던 할머니와 함께 사는 동안 엄마의 얼굴에 한참 드리워 있던 그늘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같은 여자인데도 엄마를 대하는 고모들의 태도는 왜 그렇게 자유로웠던 건지, 딸만 다섯인 외갓댁 식구들은 왜 항상 명절 당일이 아니라 다음날에 모이는 게 당연해졌는지 그런 것들도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면서 결혼한 여자는 하나씩 따지지 않아야 잘 사는 게 당연하다는 엄마의 믿음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고 살라고 악착같이 공부 시킨 딸에게 그 믿음을 다시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는 엄마의 마음은 또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밝은 밤>이 시월드에 대한 시시콜콜한 뒷이야기나 풀어내려는 책은 결코 아니다. 여성 서사를 다룬 작품이면서 몇 대에 걸친 엄마와 딸의 관계를 다루고 있기에 떠오른 일화를 먼저 적어봤다. 엄마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을 답답하게 여기는 딸의 이야기, 그런 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엄마의 이야기는 지금도 일상 속에서 늘 현재진행형이다.  


  주인공 지연은, 아빠 밥 차려 주는 게 당신 유방암 수술보다도 중요한 엄마 미선이 늘 답답하고 못마땅하다. 엄마 미선은, 부족한 것 없이 자라 많이 배우고 어엿한 직장도 있는 딸이 왜 이혼한 여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엄마와 딸의 관계가 대개 그렇듯 갈등이 생길 때마다 서로에게 가장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이 뭔지, 어디로 어떤 말을 던져야 가장 아프게 던질 수 있을지 서로가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 바람에 대화가 늘 살가울 수 없다. 지연과 미선도 서로의 아킬레스 건을 정확히 겨누다가 슬쩍 돌려가며 건드리기도 하면서 아슬아슬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지연의 아킬레스 건은 실패한 결혼 생활이고, 미선의 그것은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첫째 딸 정연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원래 한창 노려보면서 싸우다가도 '김치통 가져가, 이년아.'로 끝나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애증의 분신 관계가 모녀 관계 아니던가.


  소설은 남편과 이혼을 하고 상처가 다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새로운 직장을 찾아 '희령'이라는 바닷가 마을로 내려가는 지연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지연은 거기서 열 살 때 이후로 만난 적이 없는 할머니 영옥을 우연히 마주친다. 그 뒤로 중심이 되는 건 지연과 할머니 영옥의 대화인데, 손녀에게 들려주는 영옥의 이야기가 지연과 그녀의 엄마 미선, 할머니 영옥 간의 응어리진 한과 상처를 뭉근하게 녹이는 과정을 느끼는 것이 이 소설의 참맛이다. 어쩌면 영옥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감기 몸살에 걸린 지연에게 영옥이 끓여준 전복죽의 맛과 온기에 다름 없다.


"대접 어딨냐?" / 내가 하나 있는 대접을 꺼내서 싱크대 위에 올려놓자 할머니가 대접을 물로 한 번 헹구고는 보온병에 든 것을 옮겨 담았다. 전복죽의 고소한 냄새가 부엌을 가득 채웠다. 지는 해의 끝자락 빛이 기다랗게 거실을 타고 부엌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그 빛이 할머니의 손과 죽 위에도 내려않았다. 허기가 졌다. 나는 뜨거운 죽을 식혀가면서 허겁지겁 먹었다. 할머니의 다른 음식처럼 간이 조금 셌지만 레토르트 죽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맛이 깊었다. (175쪽)


  할머니 영옥의 이야기는 그 뜨겁고 간이 센 전복죽처럼 아무리 허기가 져도 식히지 않고는 한 입에 다 삼킬 수 없는 이야기다. 지연이 영옥의 이야기를 여러 번에 걸쳐 이어 듣는 동안 백 년 가까이 되는 긴 시간 속에 펼쳐지는 녹록지 않은 사연들이 지연의 속을 데운다. 한 대접으로 모자라 보온병에 남은 전복죽까지 다 긁어 먹고 속이 뜨거워져서 땀이 흐르고 기운이 난다던 지연의 모습은 영옥에게 이야기를 들으며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엄마에게 느끼던 불편한 감정들을 차분하게 들여다 볼 기운을 얻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고조할머니에게서 증조할머니에게, 증조할머니에게서 할머니 영옥에게, 그리고 엄마 미선과 지연에게 닿아 있는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사연들은 분명 근현대사 속 여인들의 고난사임에 틀림없다. 제도상으로 신분제 철폐와는 무관하게 가부장적 사회와 얽혀 지독하게 뿌리내린 신분 차별 의식, 일제 시대의 조선인 차별과 노동 착취, 6.25 전쟁이라는 민족의 비극과 두 동강난 한반도처럼 부서지고 흩어져버린 가족들까지 비극의 역사가 만들어낸 여인들의 한 많은 인생 이야기다. 고조할머니는 백정이라는 천한 신분이, 증조할머니는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결혼하자는 남자를 따라 병든 어머니를 버리고 떠났다는 죄책감이, 영옥에게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아버지에 대한 애정 결핍과 사기 결혼으로 인한 상처가 제 손으로 끊어버릴 수 없는 목줄처럼 평생동안 그들의 숨을 조인다. 미선에게는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외로움과 어린 첫째 딸을 잃은 상실감이, 지연에게는 변할 것 같지 않던 남편의 외도와 남편을 외도로 몰아간 건 결국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이 목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허무한 생의 시간이 그들의 목줄을 끌어당길 때마다 그들은 함께 나아갈 다른 여인들의 손을 부여잡으며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갔다. 증조할머니가 새비 아주머니의 손을, 영옥이 희자와 명숙 할머니의 손을 잡았듯이, 미선은 명희 아주머니를, 지연은 지우의 손을 잡았다. 그런 횡적 관계에 기대서 위로를 받는 동안, 모녀 사이의 관계는 줄곧 일정한 거리를 두고 완전히 멀어지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가까워지지도 못 하는 서먹한 종적 관계로 남아 근본적인 상처의 치유가 기약 없이 유보된다. 그러나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던 할머니 영옥으로부터 그동안 알지 못했던 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지연은, 지친 걸음으로 앞서 걷고 있던 엄마와 할머니의 구부정하고 슬픈 뒷모습에 조금씩 다가간다. 결국 그 걸음은 엄마 미선과 함께 외면하고 덮어두었던 상처를 겉으로 끄집어내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오래된 사진들 속에 박제하면서 화해하고 서로를 치유하기에 이른다. 엄마 미선과 할머니 영옥 사이의 조용한 화해 또한 오래된 사진이 끼워진 액자를 통해 암시한다.


  그러나 <밝은 밤>에 담긴 여인들의 이야기가 결코 여인들만의 고난사라고 볼 수는 없다. 신분이나 성별, 나이 그 어떤 것에도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하던 새비 아저씨는 가장으로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타국에 가서 일을 하다가 원자 폭탄으로 끔찍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한 후 트라우마 속에서 죽어가야 했다. 영옥의 아버지 역시 국군으로 참전했다가 겨우 살아돌아왔지만 남편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인정받지 못한 채 지나가는 버스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이들 역시 시대의 비극 속에 스러져 간 인물들이다. 여성 서사가 중심이기는 하지만 그 시대를 함께한 남성들의 모습을 그저 여성 수난사의 주적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다. 또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소설 속 여성들이 버티기 위해 붙잡는 것은 믿을 수 있는 주변 여성들의 손이었거나 끝끝내 살아보겠다는 주체적인 의지였지 남성 인물들이 아니었다. 병든 고조 할머니가 딸을 데려가겠다는 사위를 결국 따라가지 않았고, 증조 할머니 역시 딸 영옥의 결혼이 파탄나면서 마음 속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결별한 남편에게 그동안 쌓아두었던 원망을 폭발적으로 뱉어냈다. 영옥 역시 북에 두고 온 처자식에게 가겠노라 선언하는 남편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보낸 뒤 딸 미선이를 혼자 힘으로 키워냈다. 소설의 주축이 되는 이야기가 여성 고난사이면서도 그들이 고난의 책임을 남성에게만 묻고 있지 않다는 것, 여성 인물들 간의 우정과 보살핌으로 정신적 죽음의 고비를 넘겨가며 살아내는 모습을 그렸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소설 <밝은 밤>을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 아닐까.  


  소설가 오정희는 <밝은 밤>에 '슬픔을 위로하고 감싸주는 것은 더 큰 슬픔의 힘이리니.'라는 코멘트를 달았다. <밝은 밤>은 역사의 풍파를 맞으며 긴 시간 동안 여성으로서 겪어내야 했던 삶의 질곡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이 세대를 뛰어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14쪽)


소설 앞 부분에서 지연이 전남편과의 일을 떠올린 후 남긴 독백이다. 소설을 다 읽고나면 이 문장이 다시 읽힌다. 혼자가 아니라 누구하고든 마주 앉아서 서로의 마음을 꺼내어 닦아주고 말려주면서,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서로의 마음을 만져도 보면서, 그 힘으로 여러 번 새롭게 시작하는 나날이 이어지기를 소망하게 된다.


"삼촌이 날 무시했다고? 날 가장 무시한 사람은 너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넌 항상 내 인생을 부정했어." / 엄마가 소리치듯이 그렇게 말했다. (283쪽)

 

엄마 미선이 딸 지연에게 소리지르는 부분인데, 명절 얘기를  하면서 '엄마는 그렇게 살아서 좋았어?'하고 엄마에게 다그치듯이, 비꼬듯이 말했던 내가 떠올라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잠깐 책을 덮고 후회했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다그칠 자격이 있지도 않았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엄마의 삶은 본 적도 없으면서, 매 순간 엄마가 무언가 포기해야 할 때마다 옆에서 위로해 줄 수도 없었으면서, 엄마가 그렇게 지켜 온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사랑받고 자랐으면서, 적어도 딸이라는 이유로 아빠나 할머니에게 외면받는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여자라는 이유로 자아실현이 불가능한 시대에 태어난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말하는 건 정말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어느 순간마다 울컥 솟아오르는 불편함과 억울함의 감정을 해결하는 것은 엄마에게 다그쳐서 될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그렇게 버텨준 것에 감사하며 엄마의 마음을 꺼내어 닦아주고 말려주고 싶어졌다. 조만간 엄마에게도 <밝은 밤>을 선물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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