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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Jul 09. 2019

아기천사의 하루

육아와 사색_ 12

7시 40분에 갑작스러운 육퇴를 했다. 8시에 막수를 할 계획이었는데 보석이가 그냥 잠들어버린 것이다. 이따 밤수를 한 번 하더라도 지금은 이 감사한 육퇴를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게다가 시어머니가 냉장고에 갈비탕과 각종 반찬을 채워주고 가셔서 야심한 밤에 땀에 절어 요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뜻밖의 선물처럼 찾아온 여유로운 저녁에 기분이 좋다. 노트북을 켜고 소소한 오늘 하루를 기록하기로 한다.    

  

실은 결코 소소한 하루가 아니었다. 원더윅스를 마친 생후 4개월 아기 보석이가 이틀 전부터 그야말로 ‘아기천사’ 모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마트 한복판, 땡볕 아래에서 유모차를 타지 않겠다고 깽판을 쳐 한 손으로 저를 들쳐 안고 다른 손으로 유모차를 밀며 집으로 달려오게 만들었던 그 아기와 동일인물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다.



쌕쌕거리며 10시간의 통잠을 잔 보석이는 아침 7시쯤 일어나 혼자 놀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쪽쪽 빠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아기침대로 다가가 얼굴을 디밀었다. 잘 잤느냐고 인사하자 윤형이가 방긋 웃는다. 눈도 뜨기 전에 배고프다고 빽빽 울던 아기는 어디로 갔을까. 기분이 좋은 보석이를 안아 올려 수유 자리로 옮겨놓으니 기지개를 쭉 켜고 거실 자기 물건들을 둘러본다. 오늘도 재미있게 놀아볼까? 하는 눈치다. 얼굴과 배에 뽀뽀를 하니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헤헤하고 웃는다. 그래, 이게 바로 아기다운 반응이지! 보석이는 백일 무렵까지도 웃음이 거의 없던 무뚝뚝한 아기였기 때문에 슬며시 미소만 지어도 엄마 아빠는 광분한다.      


남편이 좀 더 자도록 조용히 아침 수유를 시작한다. 아침이라는 시간에는 분명 생명력을 고양시키는 영적인 에너지가 있다. 보석이가 눈을 살짝 감은 채 하루 첫 식사를 음미하는 동안, 나는 고요한 아침 공기를 천천히 흡입해 본다. 끝나지 않는 집안일에 치였던 어젯밤은 숙면으로 보상받았다. 보석이가 통잠을 자니 나도 통잠을 잔다. 임신 때도 수면이 편치 않았던 걸 생각하면 얼마 전부터 시작된 나의 통잠은 거의 1년 만의 숙면인 게다.    

  

다 먹은 아기를 세워 안아 집을 한 바퀴 돈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연다. 며칠 만에 공기가 맑다. 오늘은 꼭 외출을 하자고 보석이와 약속한다. 보석이를 주방 싱크대에 앉히고 밤새 침이 묻은 손과 입 주변을 닦아주었다. 싱크대에서 쏴- 하고 나오는 물줄기가 신기한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본다. 트림을 시키고 나서 요즘 보석이의 주 무대인 아기 체육관에 내려놓는다. 아침에는 특히 기분이 좋아 1시간이 넘도록 신나게 논다. 발차기도 하고, 기둥에 도움닫기 하여 180도 돌기도 한다. 엊그제부터는 매달린 장난감을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거기에 집중하고 있다. 나는 틈틈이 가서 응원해주며, 아침 식사도 하고 빨래도 돌린다. 보석이는 전과 다르게 꽤 오랫동안 혼자 놀고 있지만 나는 시초를 다투며 끼니를 때우던 습관 때문에 오늘도 허겁지겁 밥을 먹어버렸다.      


그러다 조금 지루한지 칭얼거리면 동요를 틀어주고 마주 보고 노래를 불러준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녀석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 보석이 옆에 누워 다리 안마기를 하며 그림책을 보여준다. 내용을 이해할 리는 없지만 제법 진득하게 내가 넘기는 그림책을 쳐다보고 있다. 가끔 응, 응 하는 추임새를 넣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한참 놀다 보면 잠에서 깨어난 지 2시간 정도 지나있다. 다시 잘 시간이 되었다. 집중을 못하고 조금씩 칭얼댄다. 나는 윤형이를 들어 올려 왼팔에 끼고 쪽쪽이를 물려준다. 왼팔에 머리를 얹고 가로로 안는 자세는 신생아기를 지나자 바로 거부하던 자세다. 그동안 무조건 세워 안아야만 해서 왼쪽 어깨 관절이 떨어져 나갈 뻔했다. 그런데 이틀 전부터 순순히 가로로 안기더니 짐볼을 타며 자장가를 두 번만 불러도 스르륵 눈을 감고 쪽쪽이를 문 입만 오물거린다. 울음소리 한 번 나지 않고 잠들다니 이게 웬 말이냐. 이렇게 쉽게 잠들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서 한참을 안고 있다.      


고른 숨소리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어 살그머니 침대에 뉘었다. 낮잠은 딱딱한 아기 침대에 눕히면 금방 깨기 때문에 우리 부부의 푹신한 침대에 눕혀 재운다. 돌연사 예방에는 좋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킹사이즈 침대를 독차지한 63cm의 녀석이 우습다. 나는 이 녀석을 둘러싼 아름다운 잠의 기운에 매료되어 살며시 옆에 눕는다. 나야 잠드는 건 순식간이다. 빨래 다 된 소리에 눈을 떠보니 아까는 소파에서 앉아 있었던 남편도 보석이 옆에 누워 자고 있다.     


1시간쯤 자고 난 후 짧은 울음을 앵 터트리며 일어나면 보석이의 3시간 사이클이 반복다. 재운 줄도 모르게 잠든 방금 전의 모습처럼 평화로운 하루였다. 오늘만 같다면, 육아 정말 할 만하다. 다른 이유가 없으면 둘째나 셋째도 욕심내겠다고 패기를 부려본다. 미화하는 김에 한 발 더 나가면, 보석이의 엄마가 되어서 행복하고 내 아기천사를 품에 안을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매일 아침을 기다려진. 하지만 밤늦게 퇴근한 남편은 오늘 나와 윤형이의 일과를 듣고 나서 안심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묻는다.     


“다음 원더윅스는 언제야?”     




원더윅스에 관한 책 <엄마, 나는 자라고 있어요> 서평

https://brunch.co.kr/@ootdaydream/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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