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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Jan 05. 2020

퇴근 후 단상

육아와 사색_ 28  너에겐 내가 너무 당연해서

 일하는 날에는 퇴근하여 시댁에서 보석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 7시쯤 된다. 이유식과 분유를 먹이고 목욕 시키고나면 저녁 8시가 훌쩍 넘는데, 어차피 남편은 밤 11시 넘어 퇴근하기 때문에 자기 전까지는 나와 보석이 둘만의 시간이다. 이유식을 하고 난 식탁은 엉망이고 빨래, 설거지도 해야 하지만 그 일들은 보석이가 잠들면 하기로 한다. 하루 종일 떨어져 있다 재회한 만큼 잠들기 전 1-2시간이라도 quality time을 가지고 싶다. 


 하지만 9개월이 된 요즘의 보석이는 특별히 많이 놀아주지 않아도 내가 옆에 있기만 하면 혼자서 잘 논다. 앉을 수 있게 되면서 부쩍 더 그렇다. 작은 그림책을 수없이 열었다 닫았다 하고 지퍼, 단추 같은 작은 물건이 있으면 연구하듯 이리저리로 돌려보며 만지작거린다. 


 나는 피곤한 몸을 거실 바닥에 누인 채 로션 뚜껑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리고 있는 아이를 찬찬히 뜯어본다. 찰흙으로 빚은 것처럼 생긴 오밀조밀한 귓바퀴, 고기만두를 연상케 하는 통통한 볼살, 이제 제법 사람의 체격다워진 어깨와 등,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는 조그마한 손가락들, 아직 굳은살 하나 박히지 않은 매끈한 발바닥... 대체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녀석이 나에게 찾아와 준 걸까!


Photo by Pixabay from Pexels


 누워서 아이의 몸을 하나씩 만져보는데, 아이는 내 쓰다듬는 손길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 개의치 않고 로션 뚜껑에 집중하고 있다. 자꾸 제 몸을 여기저기 만지면 저도 성가시지 않을까 싶지만 의아할 정도로 나의 손길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반면 아빠가 제 몸을 자꾸 건드리거나 뽀뽀를 하면, 귀찮다는 듯 밀쳐버린다. 엄마의 손길, 엄마의 존재는 보석이에게 물과 공기처럼 당연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보석이 없는 세상을 삼십 년 넘게 살아왔다. 보석이는 내가 나이 서른넷 먹을 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보석이의 출현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고, 가끔은 보석이가 없다는 전제로 진행되는 꿈을 꾸기도 한다. 따라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보석이의 변화가 당연하지 않고 무척 경이롭게 느껴진다. 


 하지만 보석이는 나 없는 세상을 겪어본 적이 없다. 세포 몇 개에 불과한 시절부터 양수의 파동을 통해 내 목소리를 들었으며, 자궁 밖으로 나와, 눈을 뜨고 처음 본 것도 바로 내 얼굴이었을 것이다. 울음으로 욕구를 표현하면 불편함이 해소되고 맛있는 먹거리가 입으로 들어오는 전자동 시스템을 제공하기 위해 늘 준비되어 있는 엄마의 존재는 보석이의 세상에서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딱히 고맙지도, 미안하지도 않은 일이다. 앞으로 엄마라는 명칭은 명칭 이상의 의미를 갖고 윤형이의 입에서 수천 번, 수만 번 불려질 것이다. 


 보석이를 만나고, 엄마가 되고, 보석이가 엄마를 당연하게 여기는 위대한 경험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가끔 육아와 집안일에 지쳤을 때는,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선택도 나쁘지 않았겠다 생각해본 적 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잠시의 투정일 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는 선택을 무르지는 않을 것 같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면 겨우 네댓 시간 자겠지만, 잠에서 깬 보석이가 엉금엉금 다가와 얼굴을 비비는 내일 아침이 기대되어 마음이 설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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