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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Feb 09. 2020

걸음마

육아와 사색_31 아기의 도전, 겁은 엄마의 몫

 오늘도 퇴근 후 보석이가 거실 안쪽에서 혼자 놀고 있을 때 살금살금 화장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퇴근 후 샤워는 항상 조마조마하게 이루어진다. 꼭 비누칠할 때쯤이면 엄마가 없어진 걸 깨달은 보석이가 웅웅 소리를 내며 화장실을 찾아오기 때문이다. 화장실 문을 열어놓고 샤워하자니 보석이가 화장실로 기어들어올 게 걱정이고, 문을 닫고 샤워하자니 물소리에 아이가 울거나 넘어지는 소리를 듣지 못할까 걱정된다. 어차피 넘어지거나 부딪치는 사고를 막을 수 없음을 각오해야 샤워를 할 수 있는 것이니 대개 문을 닫고 서둘러 샤워를 마치지만, 어제 1단 책장에 기어오르다가 머리로 쿵 떨어지는 사건이 있었기에 오늘은 문을 살짝 열어두기로 했다. 불길한 소리라도 난다면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뛰쳐나가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다.


 다급하게 샤워기를 틀고 비눗물까지 씻어냈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아직 혼자 놀고 있는 모양이다. 이럴 때 빨리 샤워를 끝내고 나가면 되는 건데, 괜한 노파심에 샤워실 유리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태연하게 세면대를 붙잡고 서 있는 보석이와 눈이 마주치고 깜짝 놀랐다! 어느 틈에 조용히 화장실로 진입해 일어서기까지 한 것이다. 아직 샤워를 마치지 못한 나는 황급히 유리문을 닫았고, 조용하던 아이는 갑자기 고아원에라도 버려진 양 유리문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했다.




 뒤집기까지는 그렇게 더디게 느껴지더니, 기고 앉고 서고 걷는 건 순식간에 진행되는 것 같다.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느낌으로 보석이의 대근육 발달은 놀라운 진보를 이루고 있다. 오늘 화장실에서처럼 이것저것 붙잡을 것을 찾아 이동하는 건 이제 우습고, 걸음마도 조금씩 한다. 돌이 되면 걷는다는 게 전혀 상상되지 않더니 돌잔치를 며칠 앞두고 저 혼자 대여섯 걸음 떼는 걸 눈으로 보고 나서야 아기의 발달 시간표가 정확하다는 게 실감이 난다.


 처음에는 소파나 책장을 붙잡고 게처럼 옆으로 걸어 다녔다. 그러더니 언젠가부터 붙잡기도 어려운 편평한 벽을 따라 이 방 저 방으로 걸어 다녔다. 그러다 잡고 설 만한 게 없는 거실의 빈 공간을 기지 앉고도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듯하더니, 타잔처럼 한 손으로 이 물건 저 물건을 잡고 원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잡을 수 있는 물건이 몇 걸음 떨어져 있는 곳에서 아무것도 붙잡지 않은 채 세 걸음 걸어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나는 열성 어린 박수와 찬탄을 퍼부어주었다.  


Photo by Henley Design Studio from Pexels


 이 놀라운 진보가 기쁘고 자랑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머리통의 안위에 대한 염려가 전혀 없는 이 거침없는 시도가 두렵다. 샤워를 마치고 이유식을 하느라 바쁜 내 뒤꽁무니를 쫓아온 보석이는 매트가 깔려 있지 않은 주방 여기저기를 찔러보고 다니더니 갑자기 붙잡을 것 없는 공간으로 무작정 발을 뗐다. 세 걸음 걷고 엉덩이로 팡 넘어져서 다행이지, 맨바닥인데 머리로 세게 떨어지면 얼마나 아프겠냐 말이다. 고교 물리의 잊히지 않는 가속도 법칙, F=ma에서 m이 무려 11kg나 된다. 불안해서 등을 돌리고 뭘 할 수가 없다. 머리 보호용 헬멧을 쓰면 좋은데 씌우자마자 낚아채서 한 번도 제대로 써본 적 없다.


 이유식을 다 먹인 후 매트가 깔려있는 거실을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는 보석이를 관찰하자니 갑자기 스키와 보드를 처음 배우던 기억이 났다. 스키와 보드를 배우는 건 걷는 방법을 새로 배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방에 눈이 수북이 쌓인 슬로프에서, 발에는 길쭉한 작대기를 끼우고 그냥 서서 균형 잡기도 힘든데 빠른 속도로 내리막길을 가야 한다. 몸은 어색하고 머릿속은 자세를 어떻게 낮춰야 할지, 속도가 높아지는데 언제 넘어져야 할지 등 의문점으로 가득 차 혼란스럽다.


 빨리 배우려면 운동신경도 중요하지만 못지않게 중요한 조건은 '겁을 집어먹지 않는' 것이다. 일단 겁을 집어먹으면, S자를 그리기 위해 등을 돌리기 어렵고 속도가 조금만 붙어도 주저앉아 버린다. 20살인지 처음 스키를 배울 때는 '겁'이라는 게 없어 빨리 배운 편이었다. 운동신경도 제대로 된 지식도 없지만 일단 직활강하고 봤다. 추운 줄도 아픈 줄도 모르고 슬로프를 오르고 또 올랐다. 하지만 한번 눈 바닥에 제대로 패대기 쳐졌을 때 뇌가 흔들려 머리뼈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연달아 골반이 해체될 듯한 충격의 엉덩방아까지 찧고 나니 갑자기 '겁'이 몰려왔다. 리프트에 오르는 게 즐겁지 않았다. 콘도로 퇴각할 때가 된 것이다. 30대가 되어 오랜만에 스키장에 갔을 때는, 20대와는 비할 데 없이 겁의 비중이 커져있었다. 슬로프를 신나게 내려가는 장면보다 넘어지는 장면이 더 먼저 떠올라 주춤거리며 리프트에서 내렸다. '돈 주고 왜 이런 고생을 하러 왔지?'라고 자문하면서.


 보석이는 겁이라는 게 뭔지도 모른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발을 뗀다. 설령 그 앞에 낭떠러지가 있어도 걸음마를 멈추지 않을 거다. 겁은 엄마인 나의 몫이다. 그렇다고 못 움직이게 가둬둘 수도 없다. 머리 부딪칠 게 두려워 울타리 안에서만 놀린다면 보석이는 세상을 탐험의 대상이 아닌 위험한 대상으로 여길 것이다. 한시도 안심하지 못하고 꿀벌 머리보호대라도 주문해야 하나 맹렬히 고민하면서 뒤꽁무니를 쫓아다녀야 해도 어쩔 수 없다. 아기는 겁을 엄마의 몫으로 넘기고 대책 없이 걸음을 떼기 때문에 이 놀라운 발달 과업을 시간표에 맞게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 엄마가 최대한 붙어있으마. 하지만 가끔은 화장실에 가게 해주렴.


 보석이도 나이를 먹으면서 겁을 알게 될 것이다. 넘어지고 아플까 봐 겁을 내고, 실패할까 봐 겁을 내고, 신뢰나 사랑을 잃을까 봐 겁을 내고, 불행한 일에 부딪칠까 봐 겁을 낼 줄도 알게 될 것이다. 겁이 전혀 없으면 조심할 수 없고, 실패와 사고를 대비할 수 없다. 하지만 겁만 낸다면 아무 도전도 성취할 수 없다. 겁과 도전의 시소는 10대의 균형이 다르고 20대, 30대의 균형이 다 다르다. 또 각자 성향마다 시소에서 겁과 도전의 앉은자리가 다를 것이다. 보석이가 앞으로 어떤 균형을 가진 사람이 될지, 나를 포함한 보석이의 주변 환경이 거기에 어떤 영향을 줄지 궁금하다.


 자신이 처음으로 허공으로 한 걸음 내디뎠을 때, 넘어지면 곧바로 받아내기 위해 엉거주춤한 자세를 한 채 열렬히 환호를 보내던 엄마의 모습을 기억해주면 좋겠다는 욕심을 부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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