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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May 06. 2020

누구 닮았나

육아와 사색_34  아기 얼굴은 족보책이다

 퇴근하고 아이를 데리러 시댁에 갔더니, 식탁에 못 보던 앨범이 잔뜩 있었다.


 "이게 뭐예요 어머님?

 "그거 애비 어릴 때 사진인데, 싹 한 번 정리했다. 보석이랑 얼마나 닮았는지 보려고. 한 번 봐, 보석인지 애비인지 구별이 안 간다."


 앨범을 펼치니 신랑의 어릴 적 사진이 잔뜩 나왔는데, 솔직히 나는 여러 명의 남자애들 중 누가 내 신랑인지 찾을 수 없었다. 몇 개의 사진을 더 넘겨보고서야 신랑 비슷한 사람을 찾아냈는데, 보석이와 눈매가 닮긴 했지만 신랑과 보석이를 구별하기 어렵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그냥 신랑이었다.


"네, 눈매가 닮았네요..."


 이목구비가 파묻혀 있던 신생아 때부터 사람들은 아기가 누구 얼굴을 닮았는지 갖가지 판단을 해왔다. 이 에피소드처럼 시어머니는 늘 보석이가 당신의 아들을 빼다 박았다고 호들갑을 떠신다. 내 유전자를 반이나 가져갔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다. 시댁 친척 어른들은 보석이가 시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한단다. 내 눈에는 시아버지가 그냥 노신사처럼 생긴 분이라 보석이가 시아버지의 어느 부분을 닮았는지 감이 안 온다. 신랑이 시아버지의 유전자를 받았고 보석이는 신랑의 유전자를 받았으니 닮기는 했겠지.


 그런데 요즈음 보석이가 친정아빠와 똑 닮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보여 깜짝 놀랐다. 웃을 때의 입 주변 근육이 우리 아빠처럼 움직인다. 너무 신기했다. 마침 나와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보석이에게서 우리 아빠 얼굴이 보이지 않느냐고 물으니 기겁을 한다. 전혀 모르겠단다. 말은 안 했지만 이렇게 보송보송 예쁜 아기를 웬 주름 많은 할아버지에 갖다 대느냐는 표정이다. 보석이가 시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들을 때 내 표정이 저럴까. 


 돌잔치에서 만난 사촌동생은 보석이를 한참을 들여다보고 나와 신랑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말했다.


 "언니를 더 닮았어요."


 사촌동생은 어릴 적부터 내 얼굴을 봐왔다. 내 이목구비는 익숙하게 알고 있겠지만 그 애가 여태 두 어 번이나 봤을까 한 신랑의 얼굴은 뭉뚱그린 이미지로만 파악될 것이다. 이제야 알겠다. 보석이 얼굴에는 족보책처럼 양가의 얼굴이 모두 담겨있다. 다만 우리는 자신에게 익숙한 얼굴을 찾아낼 뿐이다. 각자가 보고 싶은 얼굴을 다 볼 수 있도록 허락된 얼굴이다. 구순이 다 되어가시는 시할머님이 보석이 얼굴을 보고 돌아가신 시할아버님, 그러니까 보석이의 증조할아버지 얼굴이 있다며 눈물 지으신 이유다.


Photo by Burst from Pexels


 게다가 보석이 얼굴은 계속 변한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연신 찍어댄 사진을 죽 이어서 보면 알 수 있다. 눈꺼풀이 얇았다가 두터워졌고, 보조개가 있다가 사라졌으며, 개구진 표정에서 심각한 표정의 얼굴로 바뀌었다. 남편과 시아버지의 얼굴이 두드러지다가 친정아빠의 표정이 선명해졌다 해도, 앞으로 크면서 또 어느 누구의 얼굴이 올라올지 알 수 없다. 20년 후쯤은 되어야 보석이의 얼굴이 확실히 잡히고 그때서야 누굴 더 많이 닮았는지 알 수 있을까.


 아니,  나이 사십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40세쯤 되어서야 보석이의 얼굴이 완성되는 걸지도 모른다. 보석이 얼굴은 보석이만의 얼굴이 아니지만 결국 보석이만의 얼굴이다. 가족들에게 물려받은 이목구비에 더해 보석이가 살아가면서 만드는 표정과 인상이 어우러질 것이고, 보석이를 처음 만난 사람은 그걸 보석이만의 개성으로 인식할 것이다.


 보석이가 40세면 나는... 칠순을 넘어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다. 내 얼굴의 개성은 주름에 묻혀 거의 보이지 않고, 젊은 나와 알고 지냈던 사람들만 내 이목구비를 알아봐 줄 것이다. 손주 얼굴에서 내 얼굴이 보인다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주책이라 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니 그 주장은 삼켜야겠다. 아직 먼 미래지만, 그러려니 벌써 쓸쓸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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