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인형 May 13. 2020

멍멍이보다 똑똑해진 아기의 하루

육아와 사색_35 인간의 능력을 갖춰간다

 아이가 잠들고 고요해진 집.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하고, 드디어 나만의 공간인 서재에 들어왔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는데, 어디선가 보석이 살 냄새가 나는 듯하다. 오늘 낮에 보석이가 내 무릎 위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던 게 떠올라서 그런 모양이다.


 보통은 보석이가 자고 나서야 서재에 불이 켜지니 서재에 보석이의 흔적이 남을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급한 일로 책상에 잠깐 앉아야만 했고, 당연한 일이지만 서재로 쫓아온 보석이가 자기도 책상 위를 보겠다고 떼를 썼다. 책상은 보석이에게 아직 미지의 세계다. 머리 위에 펼쳐져 있던 새로운 세상에 손이 닿자 보석이는 탐색하느라 정신없었다. 키보드를 이리저리 두들기다가, 마우스를 분해하고, 포스트잇과 볼펜은 바닥으로 죄다 떨어뜨려 놓았다. 그러더니 독서대에 펼쳐져 있던 내 책을 한참 동안 넘겨보며 사뭇 진지하게 옹알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며 그림 한 장 없는 두꺼운 책을 열심히 넘긴 건지, 떠올리니 다시 웃음이 난다.


 하루가 다르게 눈부신 성장을 이루고 있는 보석이다. 돌이 지나면서, 전에 없이 책을 들고 와서 읽어달라 하는 행동이 부쩍 늘었다. 막상 책을 읽어준다고 얌전히 듣고 있는 건 아니다. 한 줄을 다 읽기도 전에 책장을 휙휙 넘겨버리고 다른 책을 뽑아온다. 얼마 안 가면 책장의 책들이 거의 다 뽑혀 있다. 의미 전달이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었다. 그냥 엄마나 아빠가 같이 있어주는 게 좋아 책 앞에 앉아있는가 싶었다. 하지만 최근에 음머~ 하면 젖소 그림을 손가락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놀라운 변화였다. 얼룩덜룩한 무늬를 가진 덩치 큰 동물이 음머~라는 소리와 연관된다는 걸 기억하기 시작했으니, 곧 '책마다 조금씩 다르게 생겼지만 공통적으로 얼룩덜룩한 무늬를 가진 덩치 큰 동물은 젖소다.'는 개념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아기를 키워보기 전에는, 아기를 '인간이기는 하지만 아직 못하는 게 많은 미숙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나라면 아기가 젖소 그림 가리키는 것 정도로 뭐 그리 호들갑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아기가 하루하루를 쌓아 1년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아기가 '무(無)에서 출발하여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나씩 갖춰가는 존재'란 걸 알게 된 지금의 나는, 사소한 손가락질 하나 가능해진 것조차 경이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시댁에서 기르는 멍멍이를 보면 부쩍 더 그런 생각이 든다. 멍멍이는 이제 열세 살, 견생으로는 환갑이 지난 나이다. 이 멍멍이는 태어나자마자 시댁으로 와서 이 집의 막내처럼 사랑받고 자랐다. 푸들이 분리불안이 심한 편인 데다, 워낙 유난한 아이라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는 경계심을 풀지 않고 다른 개를 만나도 친해질 생각이 없다. 농담 반 진담 반, 이 개는 자기가 사람인 줄 아는 모양이라고 말하곤 했다.


 처음 보석이가 태어나 시댁에 갔을 때, 50센티가 조금 넘고 자기 목도 가누지 못한 채 누워만 있는 아기라는 존재를 보고 매우 하찮게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십삼 년 견생 동안 독차지해온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이 그렇게 하찮은 작은 동물에게 쏠려버리니 적이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일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며 보석이는 조금씩 커지고 제 몸 움직이는 능력을 갱신해갔지만 멍멍이는 여전히 강아지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어 보이는 보석이를 우습게 여겼다. 그동안은 우리도 보석이보다 멍멍이가 더 똑똑하다고 인정했다. 멍멍이는 밥을 주기만 하면 혼자 잘 먹고 대소변도 가리고 가족들의 간단한 지시를 따르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런데 보석이가 몇 날 며칠을 넘어지고 자빠지더니 별안간 직립보행을 시작했다. 나도 충격이었는데 멍멍이는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자신은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았지만 사람처럼 걸을 수는 없었다. 그동안은 보석이가 멍멍이 수준의 기능을 따라잡기에도 바빴지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인간다운 능력'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보석이가 곧 말이라도 하기 시작하면, 멍멍이는 자존심을 굽히고 보석이를 자신이 복종해야 할 가족 중 하나로 인정할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다.


Photo by Ricardo Esquivel from Pexels


  보석이가 멍멍이를 앞지르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강력한 힘은 '모방'이다. 아이를 키워보면 모방이 인간이 여러 고차원적인 능력을 갖추는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일전에 내가 새로 들여온 장난감을 물티슈로 닦는 걸 유심히 보는 듯하더니, 자신의 손에 들어온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는 않고 물티슈와 비슷하게 생긴 손수건을 가져다가 엉성한 손놀림으로 열심히 닦으려 하는 걸 보고 한참 웃었다. 위험하다고 만류해도 자꾸 전기 코드를 콘센트에 꽂으려 하는 등, 자기 활동 권역 내에서 어른이 하던 행동을 부지런히 따라 하고 있다.


 어른이 뭔가를 가르쳐주려고 애쓴 것보다 어른이 하는 행동을 보고 똑같이 행동하여 학습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뚜껑을 돌려서 연다든지, 입구가 좁은 통에 들어있는 물건을 빼내고 싶으면 뒤집으면 된다든지 하는 행동을 보여주면 아이는 가만히 쳐다본다. 그리고 수일 후에 서툰 손놀림으로 그 일을 해내고 만다. 어떤 행동은 단번에 따라 하기도 하고, 어떤 행동은 수차례 시도하지만 아직이다. 블록을 같은 모양의 구멍에 넣는 놀이가 그렇다. 몇 번 시범을 보여주었지만 세모, 네모가 쉽게 구분되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며칠 지나면 금방 상황이 달라져 있을 것을 안다.


 지금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는 행동들이 이런 과정을 겪었을 거라 생각하니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동물이 가지지 못한 인간의 능력은, 내재되어 있다가 출생 이후 환경에 의해 자극을 받아 하나씩 펼쳐진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은 용광로에서 막 꺼낸 녹은 유리 덩어리 같은 상태로 자궁에서 나온다.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게 가공이 가능하다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포유동물들은 자궁에서 나올 때 유약 발라 구운 도자기 같은 상태로, 거의 완성되어 나오기 때문에 재형성의 노력이 크게 필요 없다. 비록 다른 동물들의 엄마에 비해 인간의 엄마는 수 배의 힘을 들여야겠지만, 그 덕분에 우리들의 아이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다양한 모습으로 주조될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왜 저런 지적 허기가 남아있지 않을까 반성하게 할 만큼 모든 게 궁금한 아기의 열정적인 하루가 좀 전에 막을 내렸다. 내일은 또 얼마나 달라진 모습으로 나와 멍멍이를 놀라게 할지 기대되는, 기분 좋은 밤이다.

이전 12화 누구 닮았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