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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Mar 06. 2019

브로콜리 도와줘

임신과 사색_ 6

요즘 들어 자주 들리는 라디오 공익광고가 귀에 맴돈다. 생수 회사의 협찬을 받은 듯하지만, 맑은 물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임신부가 마시는 물이 1분 만에 양수로 간다고 반복해서 말해주고 있다. 양수의 식품첨가물이 아기의 아토피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도 덧붙였다. 갑자기 경각심이 일어 지금 마시고 있는 차는 괜찮은 것일지 고민해본다. 




어제는 감정 기복이 몹시 심한 날이었다. 교회에 다녀와서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줄 알았지만 밤늦게 퇴근한 남편과 대화를 하다, 결국 그날의 불안정한 감정이 폭발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별다른 말 없이 빨리 침대로 들어가 돌아누웠기에 남편은 자세히는 모르고 그냥 기분이 별로인가 보다 했을 것이다. 


나 역시 일단 잠에 들면 극복될 일이라 생각했으나 잠이 오지 않고 갈수록 정신이 명료해져 남편이 잠들었을 즈음 거실로 나와 혼자 청승을 떨며 소파에 앉아있었다. 떨쳐지지 않는 섭섭한 마음을 내내 곱씹다가 새벽 3,4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 


요즘 나는 하루 세끼를 해결하는 것이 큰 고민이다. 입덧은 가라앉았지만 임신 전처럼 밥이 잘 먹어지지 않는다. 남편과 같이 밥을 먹는 아침식사는 푸짐하게 먹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혼자 '아침에 먹었던' 밥과 국을 다시 먹는 게 도무지 내키지 않는다. 점심은 가벼운 일품요리나 외식을 하고 저녁식사 때 다시 집 밥을 먹도록 노력하고 있다. 


어제는 기분도 영 별로였고, 점심에 떡볶이를 만드느라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 탓에 저녁에는 주방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마침 장 볼 일도 있어 집 근처 이마트에 갔다가 피자 한 조각을 사서  집에 있던 콜라와 함께 한 끼를 해결한 상태였다.


남편은 연애할 때부터 한국인들이 으레 안부로 묻는 ‘밥 먹었어?’라든지, 연인들이 흔히 애정표현을 갈음하는 ‘밥은 뭐 먹었어?’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점심은 뭐 먹었냐, 저녁은 뭐 먹었느냐 물을 때가 있다. 어제도 싱크대에 놓인 콜라 캔을 보고 그가 놀라 메뉴가 뭐였느냐고 물었다. 점심에 떡볶이를 먹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저녁에도 피자를 먹었다니 못마땅한 눈치였다. 나는 떡볶이는 집에서 만들어 먹었으며, 피자는 어쩌다 한번 먹는 음식이라고 항변했다. 


그는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으면 아토피가 온다는데, 잘하고 있지만 조금 더 신경 써주면 좋겠다며 특유의 완곡한 부탁을 했다. 하지만 나는 애써 틀어막았던 감정의 댐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어 그가 원하는 대답을 흔쾌히 할 수 없었다. 


임산부, 아기 엄마들의 성토대회와 같은 유명 맘 카페를 보면 스트레스받느니 입에 맞는 것을 잘 먹는 게 좋다는 의견이 대세다. 일주일에 한 번씩 라면을 먹거나 과자를 달고 사는 사람도 많던데 – 물론 시험날 준비를 잘했다는 학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나 시험 준비 하나도 못했어!’라고 호들갑 떠는 목소리는 자주 들리는 것과 비슷하겠지만 – 나는 나름대로 양호한 식습관의 범주에 들어있는 것 아닌가 싶어 억울했다. 시어머니가 항상 유기농에 국산 식재료를 쓰고 직접 만든 음식으로 남편을 먹여온 탓에 남편의 ‘건강식’ 기준이 높은 것에 불과하다. 밀가루 많이 먹어 아토피가 생긴다면 파스타 먹고사는 서양 사람들은 뭐란 말인가. 


먹는 게 그리 걱정되면서 나에게 언제 밥 한 끼 차려준 적이 있었나. 내가 오늘 주방에 갇힌 듯 얼마나 숨 막힌 하루를 보냈는지 알기는 할까. 한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보면 별 일 아니게 느껴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한 번 터져버린 부정적인 생각의 물줄기가 잦아들 줄 몰라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었다.




물 공익광고는 감정이 폭발했던 나의 항변을 떠올리게 했다. 남편의 건강식 기준이 높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밥을 제 때 챙겨 먹지 않는 나의 식습관은 오래전부터 있던 것이다. 그리고 밀가루는 아니지만 ‘식품첨가물’이 들어 있을 인스턴트 음식이나 과자, 아이스크림을 하루에 한 번 정도 먹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임신부의 식습관으로 점수를 매긴다면 아주 엉망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상위권은 아닌 게 분명하다. 먹고 마시는 모든 것에 항상 각성하고 있던 임신 초기에 비하면 많이 해이해졌다. 내가 마신 물이 1분 안에 양수를 구성하는 성분이 된다니 소름이 돋는다. 



나에게는 일생 중 아주 일부인 10개월이지만 아이에게는 평생을 결정하는 중차대한 시기다. 경솔한 행동이 엄청난 나비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무신경한 성격을 핑계 삼아서는 안 된다. 

    

오늘은 오랜만에 브로콜리를 사 와서 마늘과 함께 볶아 먹었다. 브로콜리는 내게 건강식의 상징이다. 손질과 조리가 번거롭고 맛도 자극적이지 않지만 빡빡한 브로콜리 송이 속에는 알찬 영양분이 가득 들어있을 게다. 아줌마 파마머리 같은 브로콜리 송이가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치고 나니 더욱 파릇해졌다. 


내 몸, 그리고 내 아이에게 좋은 것을 먹여준다는 데에 기분이 좋아졌다. 앞으로 식재료와 간식, 마시는 차에 신경을 더 써야겠다.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훈련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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