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
언제나 무언가가 되고 싶어 했다. 꿈이 무엇인지 대답해야 했고, 언제나 무엇이 되기 위해 인내하고 노력해왔다. 지금 나보다 젊었던 부모님을 보면서 무작정 어른이 되고 싶어 어른들을 따라 하기도 했다. 물 한잔을 들이켜고 "크~"하는 소리를 내면 어른이 될 것만 같았다. 아직은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던 시절 대학만 들어가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직장인이 되면 끝없는 불안함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늘 독립된 공간, 화목한 가정을 갖는 상상을 했다. 그렇게 항상 언제나 늘 지금 내가 아니라 또 다른 무언가가 되길 바랬다.
이 모든 것 하나씩 되어보니 다시 어린아이가 되고 싶어 진다. 다시금 어린아이가 되고 싶은 이유는 우리 안에 어린아이가 한 명씩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모든 성인들의 삶에는 어린아이가 한 명 숨어 있다.
영원한 어린이, 늘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고,
그러나 결코 완성되지는 않으며,
끝없이 보살펴주고 관심을 가져주고
교육을 시켜줄 것을 요구하는
어린아이가 우리 안에 숨어 있다.
윌리엄 새들러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
10년을 정신없이 달려와 보니 나는 없고, 일상만 남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는 자기 소개할 기회도 많지 않지만, 어쩌다 나를 소개할 일이 생기면 회사와 직함이 나를 소개하는 전부다. 그 이외에는 마땅히 나를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평소에도 나는 이름 대신 누구의 아빠, 누구의 엄마, 그리고 어디에 소속된 누구로 불린다. 내가 하는 일로써, 그리고 내가 보내는 일상의 일부분으로 불리는 것이 가끔은 내가 없어지는 것 같아 두렵다.
20대는 알아야 하는 것들을 알아가기에 바빴다. 아파야 하는 청춘이라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도전하고 실패하고 깨지고 포기하는 방법을 배웠다. 현인들의 강의를 찾아 듣고, 각계각층의 멘토들을 찾아다니며 강연을 듣고 닮아가려 노력했다. 나보다는 그들처럼 살기를 바랐다.
30대에는 물음 앞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무척이나 고민스러웠다. 일이 손에 익고, 동료들에게 인정받고, 일선에서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남들이 말하는 성공의 길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라면 될 것만 같았고, 조금만 더 하면 손에 넣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도 가도 끝없는 여정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들과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들을 너무나 많이 흘려보냈다.
20대와 30대에는 모든 것들이 무척이나 고민스러웠는데, 40대는 그동안의 관성으로 빠르게 지나가 버릴까 두렵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낯설지도 않다. 이미 일상은 익숙하고 손에 익어버렸다. 누구를 닮아가려는 변화보다 익숙해진 나만의 방식을 고집하게 되어버렸다. 이렇게 앞으로 10년이 흘러가 버리는 것은 아닐까?
마흔 언저리가 되니 마음속의 어린아이를 다시 찾게 된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었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나? 내가 상상하던 일상을 다시 떠올려본다. 그렇게 제대로 가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힘들지만 순항 중인 것 같아 안심이다. 하지만 어린아이였던 그 시절처럼 다시금 관심을 받고 싶고, 일상의 일부분이 되기보다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아쉽다.
내 안에서 잠자고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하게 되면, 나는 그 아이를 깨울 수 있을까?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철없고, 조금은 이기적인 그 아이를 깨워 평화로운 일상에 다시금 물결을 일으켜야 하는지 고민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그 아이를 살며시 깨울 것이라는 사실을. 세 번째 성장기가 있다면 마흔쯤이 그 성장기가 되리라는 것도 안다. 성장의 결과 나도 불혹(不惑)이 되어 갈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어린 나를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