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 삼천원의 선택

by 시선




팔월의 제주는 생각보다 꿉꿉했고 예상했던 것보다 흐렸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다. 연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방문한 제주는 알아갈수록 신비한 곳이었고, 그런 제주를 마음껏 경험하기에 이 주라는 시간은 턱없이 짧게 느껴졌다. 빽빽한 일정으로 가득한 시간표에 우리의 마음은 단 한 번 갖게 될 주말에 대한 기대로 잔뜩 부풀었고, 제주로 떠나기 몇 달 전부터 우리의 준비는 시작되었다.



각자 원하는 일정을 마치고 모인 토요일 밤, 우리는 난관에 부딪혔다. 제주는 넓었고 여덟 명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우연히 들른 협재에 반해 다음날 다시 가서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지만, 누구는 제주의 말을 타고 싶었고 또 누군가는 서핑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결국 오랜 이야기 끝에 우리는 다음날 아침 함께 새별오름을 오르기로 했고, 그렇게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협재의 바다에 몸을 담그는 상상을 접고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날 오른 새별오름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제주에 도착한 이래로 처음 마주하는 쨍한 하늘, 그리고 그 아래 빼곡하게 펼쳐진 녹색빛 풀숲과 저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는 신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들어낸 것처럼 완벽했다. 모든 것이 좋았고 우리는 꺄르르 웃어댔고 마음에는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더 좋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일요일 오전을 보내고 우리는 각자가 원하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흩어지기로 했다.



계획이 수정된 나의 그 날 오후는 바다 앞의 비건 음식점, 그리고 그 곳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진 서점에서의 맥주 한 캔과 제주 할망에 대한 책으로 채워졌다. 이제 햇빛이 너무 쨍하지 않을 때를 기다렸다가 협재 바다에서 노을을 보는 것으로 제주에서의 완벽한 하루가 완성될 예정이었다. 적어도 그 때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따스하게 기울어가는 햇빛을 받으며 협재에 도착해 두 발을 물에 담그기 전까지는.



발목에 찰랑이며 와닿는 바닷물을 느끼며 그 속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본 순간 온 몸으로 깨달았다. 저거다. 내가 하고 싶은 거. 내가 오늘 하루 동안 계속해서 하고 싶었는데 잊고 있었던 것. 같이 들어갈 사람이 없어서, 혼자 해수욕을 한다는 건 상상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 접어두었던 일. 그와 동시에 마음 속에서 앎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나의 욕망을 실현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롯이 나뿐이라는 것과 다음이란 없다는 거. 내가 원하는 것은 그 순간, 그 하늘 아래 그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그건 지금 그 순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마음을 모른 척하고 애써 만족한 체하며 돌아섰을 거였다. 나에겐 갈아입을 속옷도, 물놀이를 위한 도구도 없었고 해수욕장이 문을 닫기까지는 사십 분이 채 남지 않았으니까 그건 아마도 합리적인 결정이었을 테다. 그런데 그 때는 합리적인 결정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내 마음을 들어주기 위해서 정말로 비효율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차오르고 차올라서 한 방울이 또르르 넘쳐흐른 순간 나는 해수욕장 앞의 편의점으로 가 물에 들어갈 때 입는 반바지를 사고 튜브를 반값에 빌렸다. 시간이 없으니 얼른 들어가라는 편의점 주인 할머니의 목소리를 등 뒤에서 들으면서 나는 그대로 바다로 내달렸다. 바다는 좋았다. 튜브에 걸친 몸의 자세를 바꿔가며 이리저리 움직여보고 가만히 떠있기도 하다가 이내 알게 되었다. 나는 물놀이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이 하늘과 구름과 석양을 물 속에서 보고 싶었던 거구나. 그건 훨씬 친밀한 경험이었고, 나는 풍경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내가 보던 풍경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방수가 되지 않아 무겁게 축 늘어지는 민소매를 입고 본 그 날의 저녁 하늘은 내가 이제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고, 그 날 그 자리에서 바다에 들어가기로 한 것은 내가 그 해 한 선택 중 가장 잘한 것이 되었다. 이만 삼천원을 내고 나는 내가 나에게 가지는 온전한 책임과 그에 따르는 엄청난 자유에 대해 배웠고,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그걸 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건 앞으로 무수히 있을 나를 위한 선택의 시작점을 찍었다. 삶은 그렇게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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