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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cky Ha May 16. 2019

열무




봄이 와서 날이 풀리면 내 마음은 분주하다. 냉이며 쑥, 달래를 캐러 들로 나갈 생각에 엉덩이가 들썩이고 텃밭에서 무성하게 자랄 여름 채소들을 상상하면 가슴이 설렌다. 들뜬 마음이 들과 밭으로 통통 튀어 다닌다. 제주에 내려와서는 여기에 할 일들이 더해졌다. 3월에는 귤나무 전정을 하고 중간중간 짬을 내서 달래를 캔다. 달래의 알싸한 맛과 싱그런 향기는 겨우내 지친 몸의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고향의 맛이다. 또 4월 한 달은 고사리 철이다. 한라산 자락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새벽부터 오전 내내 고사리를 꺾는다. 노동과 재미, 그리고 자연과 친해지는 계절이다. 새벽에 이슬을 뒤집어쓰고 분가루를 묻힌 듯 뽀얗게 보이는 고사리를 만날 때의 기쁨과 연하디 연한 고사리의 허리를 꺾을 때 나는 소리, ‘톡’과 ‘똑’ 사이의 중간쯤 어딘가에서 나는 그 어여쁜 소리는, 자꾸자꾸 들어도 계속 듣고 싶어 지는 소리다. 자연 속에 푹 잠기어 그가 내어주는 것을 감사히 취하고, 그것으로 나물을 먹어 겨울 동안 지친 나의 몸을 회복하고 또 그것을 팔아 생활에 필요한 돈을 만드니 어느 과정 하나 허투루 할 수 없고 마음을 담지 않을 수 없다.     


봄에, 산으로 다니면서도 또 하나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텃밭 농사 준비다. 텃밭에 거름을 내고 삽으로 땅을 깊이 파서 흙과 거름을 섞어주는 일. 그 일을 제 때에 하지 못하고 4월이 다 가버리면 할 수 없이 모종 심기나 씨앗 뿌리기를 먼저 하고 나중에 웃거름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웃거름을 주는 것보다는 흙을 깊이 파서 섞어주는 밑거름 주기를 더 좋아한다. 밑거름을 주면 채소들이 땅으로 힘차게 뿌리를 뻗으며 왕성하게 양분을 빨아들여 흡족해할 것이지만, 시기를 놓쳐 웃거름을 주면 채소들이 영양분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뿌리를 내리다가 위에서 찔끔 내려오는 양분에 감질나서 성격이나 버리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우려 때문이다.     

작년과 다르게 올해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적당한 시기에 흙과 거름을 섞어주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연히 열무 씨를 뿌렸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어린 열무를 솎아서 살짝 데친 후에 들기름과 날된장을 넣어 무쳐 먹고, 다 자라면 열무김치를 양껏 해서 고추장에 참기름을 넣고 매일 밥을 비벼 먹을 상상을 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어린 열무를 된장에 나물로 무치면 포용의 특징을 가진 된장이 열무를 싸 안아 간을 해주고 열무 특유의 씁쓰름한 맛과 향이 스며 나오게 도와준다. 거기에 고소한 들기름의 향이 어우러지면 순하고 구수한 맛이 된다. 그 열무 나물을 한 젓가락 입에 넣으면 열무 나물을 해주시던 할머니가 생각난다. 그것을 맨밥에 척척 얹어 먹으면 마치 어릴 적 햇빛이 잘 드는 고향 집 툇마루에 앉아 있는 듯 마음이 말개진다. 나는 그런 시골 맛을 좋아한다.     


하지만 올해 나의 이 열무를 향한 첫 번째 갈망인 열무 나물의 환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올봄 따라 너무 가물었고 남편이 서울로 근무지가 바뀌는 바람에 텃밭이 있는 집에는 주말에만 갈 수 있는 처지가 되다 보니 그만 열무에 물을 충분히 주지 못한 것이다. 그전 주말에 물을 충분히 주고 올라왔던 터라 주말에 집에 내려가면 밭에서 여린 열무를 솎아 열무 나물 해먹을 생각에 잔뜩 부풀었는데, 아뿔싸 목마름에 지친 우리 열무는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죽기 전에 어서 빨리 후손을 남겨야 한다는 본능에 따라 그만 꽃대를 하나, 둘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린 열무를 솎기는커녕 채 자라지 못한 땅꼬마 열무가 이내 억세질 게 불 보듯 뻔했다. 어쩔 수 없이 남편님께 몽땅 다 뽑으라고 했다. 농사에 문외한인 남편이 건강에 좋은 열무와 채소를 먹을 거라며 유황까지 구해서 밭에 뿌려주었는데, 다 자라 지도 못 한 열무를 뽑아야 하니 그도 적잖이 실망한 눈치였다. 하지만 어쩌랴.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해야 하는 법.    


칼과 다라를 꺼내와 마당 한쪽 그늘에서 열무를 다듬었다. 볼품없고 작달막했지만, 유황을 뿌려줘서 그런지 향이 참 진했다. 씻을 때 조금 떼어서 맛을 보니 마트에서 사는 열무와는 ‘끕’이 달랐다. 연하긴 하나 뭔가 싱겁고 향도 없는 열무가 아니고 어릴 때 먹던 바로 그 맛이 났다. 쌉싸름함이 살아있는 향이 깊고 고소한 맛. 나는 열무 나물에 대한 서운함은 까맣게 잊고 신이 나서 건고추를 물에 불리고 풀을 쑤기도 여의치 않아 햇반 하나를 전자 레인지에 돌려, 액젓이랑 남편이 지난해에 담가 둔 양파 청을 넣어 ‘쉑잇쉑잇’ 믹서기로 갈아주었다. 그리고는 반나절을 소금에 절여둔 열무에 양념을 부어 아기 다루듯이 살살 버무려 통에 담았다.    


그대로 밖에서 하룻밤을 재우고 일요일인 그다음 날 저녁에 드디어 뚜껑을 여니 냄새가 심상치가 않았다. 좋아도 너무 좋았던 거다. 남편과 나는 큰 양푼에 양껏 열무김치를 넣고 참기름이랑 밥이랑 고추장을 넣어 쓱쓱 비벼 한 숟가락씩 입에 넣고 감동의 탄성을 질렀다.    






저녁나절 열무김치에 밥을 비벼 마당의 한쪽 그늘에 앉아 오순도순 먹고 있으려니 ‘뭐 행복이 별건가 이런 게 행복이지’ 싶었다. 올해도 열무는 나의 입으로 들어와 행복을 터트려 주었다. 내년에도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제 때에 거름을 내고 또 열무 씨를 뿌려야지. 그리고 올해 먹지 못한 열무 나물도 꼭 해 먹어야지. 그러려면 기도를 좀 해야겠다. ‘하느님, 내년에는 봄에 비를 적당히 내려주셔서 제가 열무 나물을 꼭 먹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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