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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cky Ha Jul 15. 2019

미숙 언니

선물 같은 우연






살다 보면 선물 같은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 예기치 않은 선물을 받을 때의 놀라움은 삶이 주는 아주 특별한 기쁨이다.     


갱년기를 맞아 신체적 변화가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나를 위해 남편은 갱년기 치료로 좋다는 한의원을 찾아 인터넷을 며칠을 뒤졌다. 그러더니 몇 개의 한의원을 물망에 올려놓고 한의원 투어를 시작했다. 워낙 돌아다니고 쇼핑하는 걸 싫어하는지라 고마운 마음은 어딜 가고 살짝 심통이 나 있었다.     


그러다가 세 번째로 들른 서울 남부터미널 근처의 한의원. 한의원에 들어서서 또다시 이런저런 검사를 하는 것이 귀찮게만 느껴져 접수대에서 반갑게 응대하는 여자에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진료 전 문진을 위한 종이를 받아 들고 가까운 의자에 가서 앉았다. 강북에서 남부터미널까지는 전철을 타고 한 시간 하고도 반이나 걸려서 돌아다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진이 다 빠져 있었다.     


남편과 마주 앉아서 먼저 인적 사항을 적고 있는데 한 여자가 우리 앞에 나타나서 나에게 말했다. 

  “혹시, 연희 아니니?”

나는 당황해서 그 여자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나는 결혼과 동시에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행정상의 오류로 이름이 바뀌어 있던 터여서, 그야말로 ‘오리지널’ 오랜 관계가 아니고서는 나의 원래 이름을 알 수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를 보며 웃고 있는 모습을 자세히 보니 그 여자는 다름 아닌 내가 어릴 때 그토록 좋아하던 

미숙 언니였다. 나는 그 여자가 미숙 언니라는 것을 알고는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엉켜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낯설고, 넓기도 넓고, 사람이 많기도 많은 서울 하늘 아래서 35년 전 서울로 훌쩍 시집을 가버린 미숙 언니를 만나다니.    


나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 1학년 12월에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식모살이를 갔다. 그리고는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두 달 만에 쫓겨나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와야 했다. 겨울이 지나고 한 학년이 올라간 친구들이 아침 일찍 학교에 가기 위해 마을 앞 버스 정류장에서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릴 때, 나는 할아버지의 리어카를 밀고 그 옆을 지나가야 했다. 학교 가는 친구들에게 그런 내 모습을 보이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던 나의 마음을 할아버지가 알 턱이 없었다. 나는 외양간에서 일하러 끌려 나오기 싫은 소처럼 리어카 꽁무니에 고개를 처박고 마을 앞 정류장을 지나갔다. 가난이라는 부끄러움으로 화끈거리는 얼굴과 등을 죄인처럼 리어카에 처박고 한 길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철둑 길을 건널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참 예민한 사춘기 나이에 학교라는 집단에서 쫓겨나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던 나는 낯선 소외감과 외로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견뎌내느라 아직은 한참 어리고 여린 마음이 너덜너덜했다. 


오전 일이 끝나고 점심을 먹으면 해가 너무 뜨거워져서 들일을 할 수 없다. 점심 밥상을 치우고 나면 농부들은 곤한 낮잠에 빠지고, 해가 꺾여 늦은 오후에 들일이 시작되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마을은 물에 잠긴 듯 고요와 적막이 내려앉는다. 그 적막한 외로움에서 유일한 탈출구가 되어준 것이 바로 미숙 언니였다. 나는 매일 미숙 언니네 집에 갔다. 언니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살림을 돕고 있었다. 미숙 언니는 성당 주일 학교에서 교사를 할 만큼 신앙심이 깊었고 특유의 대장 기질로 사람을 유쾌하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온 마을이 고요한 정적에 싸여있을 때, 언니네 집의 윤기 나는 마루에서 피어오르는 우리의 수다와 웃음은 끝이 없었다.     


수다 중에도 우리의 손은 늘 분주했다. 언니네는 농사가 많았고 식구들도 많아서 살림을 도맡아 하는 언니의 일도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수다를 떨며 빨래를 개고, 콩이며 팥을 고르느라 잠시도 손을 쉬지 않았다. 그러다 지치면 따가운 햇빛으로 달아오른 마당에 물을 뿌려 식히며 소리를 모아 성가를 부르곤 했다. 그럴 때면 작게 움츠려있던 나의 마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을 나는 듯 가벼워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밥을 하다가 언니는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곧 서울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고. 그날 나는 언니와 헤어지는 게 너무 슬퍼서 집에 돌아와 내내 울었다.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동네 어르신들을 위해 대절한 버스를 얻어 타고 나도 서울에 올라갔다. 성당이 너무 커서 제대 앞에 있는 언니의 모습이 아득해서 더 슬펐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가 언니의 뒷모습을 보고 또 보며 터져 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미숙 언니는 이제 원숙한 중년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어딘지 모를 깊이 있는 향기를 가진 여인. 미숙 언니인 것을 확인하고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처음 와보는 그 한의원이 익숙하고 믿음이 가는 장소인 듯 긴장이 풀렸고, 치료도 시작하기 전에 벌써 다 나은 듯 안심이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한여름 뙤약볕에서 다른 애들 다 들어가서 노는 움벙(깊은 웅덩이의 사투리)엘 물이 무서워 들어가지 못할 때, 미숙 언니가 나를 어깨에 매달고 헤엄쳐 들어갔을 때 느꼈던 그 든든함과 안온함이 떠올랐다. 그녀가 나에게 그런 존재였음이 35년이 지난 지금, 갱년기로 휘청거리는 나에게 그대로 느껴졌다.     



또다시 이르는 결론이지만 인생은 참 알 수 없다. 그냥 인생이 준비한 엄청난 우연의 선물들을 매 순간 감사하게 받으면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찾아온 작은 행복을 맘껏 누리면 된다. 그러면 행복해하고 감사해하는 나를 보고 인생은 뿌듯하여 또 다른 선물을 준비할 것이다. 고마워라, 내 인생. 아, 인생이 오늘은 무슨 선물을 준비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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