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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다올 Oct 22. 2024

04 반항하는 청년 영수

  반항하는 청년 영수         



      

   영수는 승이를 따라다니면서 머슴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승이가 오늘은 소 풀 베고 지게 지는 요령을 가르쳐주고, 내일은 볍씨를 뿌리고 모종을 가꾸고, 채소 모종을 이식하고 곡식을 재배하는 요령을 가르쳤다. 영수는 농사짓는 법을 하나하나 익혀갔다.

   외할머니 제삿날이 다가왔다. 하동장 집안 아이들은 영수만 빼고 장손과 막내와 손녀는 학교에 다니고 있는지라, 어메가 영수더러 외할머니 제사에 같이 가자고 했다.

   “잔갑아! 오늘 외할매 제삿날인데, 같이 가자.”

   영수는 얼른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어메를 따라 나섰다. 집에 있으면 또 아배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를 것이고, 할배는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시킬 것이다.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를 나선 어메가 등치가 어른만한 아들에게 넌지시 말했다.

   “잔갑아! 외갓집에 가믄, 성국 생이가 한우 농장을 하고 있는데 일도 좀 거들어주고 이바구도 들어 보거라.”

   “예, 안 그래도 성국이 행님 만나보고 싶어십니더. 농장도 보고싶고요.”

   외가는 봉현마을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하동마을이다. 걸어서 가면 사오십 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영수와 어메는 쉬지 않고 걸어갔다, 외가 싸립문에 도착하자 외삼촌이 대청마루에서 밤을 깎고 있었다.

   “오라비 뭐 하시는기요?” 어메가 반가움에 먼저 말을 걸었다.

   “아이고! 아야 어서 오니라. 영수도 왔네.”  

   “잔갑아, 외삼촌한테 인사드리거라.”

   영수가 외삼촌에게 큰절을 하려고 하자 외삼촌은 극구 사양하며 “좋게 앉아라.”하고 말했다. 이때 성국이 형이 싸립문으로 들어섰다.

   “고모 왔십니꺼! 영수도 왔네, 오랜마이다!” 성국이 형이 말했다.

   “행님 오랜만입니더. 농장에 댕기오는 길입니꺼?” 영수가 말했다.

   “아이다. 좀 있다가 소 저녁 주로 가야제. 영수 니도 같이 가볼래?”

   “야! 같이 가입시더. 안 그래도 농장 구경하고 싶었십니더.” 영수가 대답했다.

   성국이 형이 집안 설거지를 마치고 “소 저녁 주로 가자.”고 했다. 영수는 형을 따라 한우 농장으로 향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기슭에 축사가 여러 동 보이고 소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일꾼들이 거름을 치우고 소 저녁을 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국이 형이 말했다.

   “여, 내 고종사촌 동상이라. 이름은 영수고.” 성국이 형이 영수를 소개했다.

   가까이 있는 일꾼들은 영수와 악수를 나누고, 멀리 있는 일꾼들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성국이 형이 기르고 있는 한우는 오백여 마리가 넘었다, 해마다 새끼를 나아서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영수야! 니도 여서 농장 일 배우면서 일하고 싶나?” 성국이 형이 물었다.

   “지야 그라고 싶지만 아부지가 우째 말할라카는지 모르겠십니더. 할배도 뭐시라꼬 말할련는도 모리겠고요.” 영수가 말했다.

   영수는 내심으로 이참에 아배와 할배 그늘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외가 한우 농장에서 일하면서 일도 배우고 여기서 생활하면 마음도 편할 것 같았다. 농장 일을 거들어주고 외가로 돌아온 영수는 우물가에서 손을 씻으면서 대청마루에서 어메와 외삼촌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아이고! 말도 하지 마소! 저거 아부지는 씨알도 안 묵힌다카이.” 어메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영수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못 들은 척하고 세수를 하고 저녁 먹을 준비를 했다. 영수는 외가 식구들과 함께 대청마루에서 밥을 먹었다.

   “고모! 영수 우리 농장에서 한우 사육하는 거 배우면서 지내믄 좋겠는데. 고모는 우째 생각하시는기요?” 성국이 형이 어메를 쳐다보았다.

   “지가 농장 일 배우고 싶다믄 여서 지내믄서 일 배우믄 좋체!” 어메가 말했다.

   “아이고! 영수가 우리 농장에서 지내믄서 일 배우믄 좋체!” 외삼촌이 맞장구를 치면서 영수를 쳐다보았다. ‘영수 니도 좋체?’하고 묻는 얼굴이었다.

   “지야 외갓집 농장에서 일 배우고 지내믄 좋지예. 그란데 우리 아부지가 우째 생각카는지 모리겠십니더?” 영수가 말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영수는 외사촌 형 성국이의 권유로 외가 농장에 머물면서 일을 배우기로 했다.

   다음날 어메는 영수를 외가에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동장 집안은 썰렁했다. 할매도 보이지 않고 아배도 없었다. 어메는 친정에서 싸 온 떡과 반찬을 부엌 천정에 올려놓고 설거지를 했다. 한나절이 지나고 밖에 나갔던 할매가 돌아왔다. 할매는 며느리 친정집 안부를 묻고 영수는 왜 안 왔는지 물었다. 어메가 외가 농장에서 농장 일을 배우라고 영수를 외가에 맡겨놓고 왔다고 말하자, 할매도 “아이고! 잘했다. 우리 집에 있으믄 손자 바보 맨들끼고, 저거 아부지 등쌀에 아가 기가 죽어서 어데가서도 말도 못할끼다. 잘했다!”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해서 영수는 외가 농장에서 농장 일을 배우게 되었다. 영수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홀가분했고 농장 일을 배우면서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동네 마실 나갔던 아배가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 오자마자 아배는 영수를 찾았다. 할매가 아배에게 앞으로 영수는 외가 농장에서 일 배우면서 지내기로 했다고 전해주었다. 아배가 대뜸 고함을 질렀다.

   “무씬 일을 그래하노! 내한테는 상의도 안하고. 저거 어메는 어데로 갔는기요?”

   뒤란에 나갔던 어메가 안채 마당으로 들어오면서 그 소리를 들었다.

   “잔갑이 저거 외삼촌도 그라고, 농장하는 성국이도 잔갑이 보고 ‘여서 지내믄서 일 배우라’고 해서, 내도 그기 좋은 것 같애서 그래라고 했소!” 어메가 말했다.

   아배가 어메가 하는 말을 듣고 나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손위 처남이 잔갑이에게 ‘농장일 배우라’고 했다고 하고, 처가 조카도 그래라고 했다는 어메 말에 딴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영수는 이제 외가 농장에서 한우를 사육하고 농장을 운영하고 일꾼들을 부리는 요령을 외사촌 성국이 형으로부터 하나하나 배우기 시작했다. 영수가 농장에서 일한 지 한 달이 지났다. 하루는 어메가 친정으로 영수를 데리러 왔다. 아배가 영수가 없어니까 잔심부름 시킬 사람도 없고, 집안 잔일은 본인이 다해야 하니까 일할 때마다 짜증을 부리고 잔소리를 해대서 어메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왔다고 했다. 영수가 아배 그늘에서 벗어난 지 한 달여 만에 다시 봉현마을도 돌아왔다.     

   부지깽이도 덤벼든다는 바쁜 온뉴월 여름 농번기가 다가왔다. 온 집안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에하, 에하! 에하, 에하!”

   한여름 봉현 들판엔 도리깨질 노랫소리가 가득하고, 영수는 오늘도 가락을 주고받으며 보리타작을 한다. 도리깨는 튼튼한 나무나 대나무를 자루로 만드는데, 끝부분에 구멍을 뚫어 질긴 나무로 된 이음 못이나 비녀못을 끼워서 도리깨 장군과 연결한다. 도리깻열이라고도 부르는 도리깨 장군은 어른 엄지손가락보다 약간 굵은 박달나무 서너 가닥이나 오래 묵은 통대나무를 쪼개어 소가죽 끈으로 엮어서 만든다.

   보리타작은 쉬지 않고 장단을 맞추면서 도리깨질을 한다. 머슴 승이가 “에하” 하면, 영수와 일꾼들도 모두 “에하”하고 후렴을 넣으면서 도리깨소리를 주고받았다.

   “돌리치고!”

   갑자기 승이가 비스듬히 보릿단을 내리쳤다.

   “돌리치고, 에하!”

   나머지 일꾼들이 후렴을 넣었다.

   “돌리치고!”, “돌리치고, 에하!”를 반복하며 보릿단을 뒤집어 알곡을 남김없이 털어냈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기울고 뒷산 그림자가 논 언저리까지 내려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면, 영수와 일꾼들은 보리 가마니를 지게에 짊어지고 봉현마을로 돌아왔다.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어 해지개 능선을 따라 노을이 흐르고, 해질녘 굴뚝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연기는 봉현마을 초가지붕을 집어삼켰다.

   벌써 일주일째 보리타작을 하다 보니 영수는 어깨와 팔다리 안 결리는 데가 없었다.

   오늘도 아배는 술에 거나하게 취해 저녁 무렵에 돌아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집에 아무도 없나! 가장이 들어왔는데, 와! 아무도 내다보지도 않노!”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장독대에선 영수와 일꾼들이 씻으면서 저녁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와! 아무도 대답이 없노! 잔갑아! 니는 애비가 집에 들어왔는데, ‘잘 다녀오셨습니꺼.’하고 인사도 안 하노?“

   머슴 승이와 동식이와 일꾼들은 슬금슬금 곁눈질하면서 아배를 피해 장독대 대추나무 그늘 아래에서 엉거주춤 눈치만 보고 있었다.

   아배는 어데서 뺨을 얻어맞고 왔는지 고함을 지르면서 분풀이를 식구들에게 했다.

   “이래 눈코 뜰 새 없이 바뿐데, 맨날 술만 잡숫고 오믄 우짜라는 겁니꺼?” 참다 못한 영수가 한마디 했다.

   아배는 빽 하고 고함을 질렀다.

   “뭐! 뭐시라고? 이넘의 손! 애비가 하는 말이 그래 까탈시립더나?”

   승이와 일꾼들도 술 취한 아배를 외면했다. 아배는 아들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말대꾸하자, 애비 위신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는지 고함을 더 크게 지르면서 삿대질까지 했다.

   “야 이넘의 손아! 애비가 니 눈에는 그래 밖에 안 보이나?”

   “그마 하이소! 넘 부끄럽습니더!” 영수가 소리를 질렀다.

   “이넘의 손! 여때까징 밥 멕이고 키었더만, 인자는 애비한테 대드나? 이놈의 손! 나가 디지거라! 망구 씰데도 없는 넘.”

   “아이고! 이기 무신 일이고! 잔갑아, 니가 참아라. 아부지가 술이 취해서 하는 소리 아이가. 니가 참아라.“

   어메가 나서서 남편을 안방으로 데리고 갔다.

   방에 들어가서도 아배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저넘의 손이! 인자 애비도 지 눈에는 안 보이는 갑제? 어데서 눈까리 벌겋게 뜨고 대드노! 빌어묵을 손!”

   “아이고! 인자 그만하고 주무시이소.” 어메가 남편을 나무랐다.

   “니는 와 저넘 편을 드노! 내가 니 신랑이가! 넘이가?”

   “아이고! 술 냄새야! 고마 시끄럽소! 입 다물고 잠이나 자소!”

   어메가 안방을 나오면서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영수는 그동안 가슴에 응어리졌던 화가 치밀어올라 울분을 토했다.

   “이 집구석은 일하는 사람은 사람도 아이가! 맨날 보리타작하고, 전신이 쑤시고 아파 죽겠는데! 고상했다 말 한 마디 못 듣고, 이래 욕만 얻어묵고 살아야 됩니꺼? 내사 인자 때리치아 뿌고, 객지 나가서 공장 다닐라캅니더! 인자는 내한테 이래라저래라 카지 마이소! 낼부텅 내 찾지 마이소!”  

  “이기 무신 소리고?”

   할배가 사랑채 봉창 문을 열고 안채 마당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할배요! 방에 가마이 앉아서 에헴 하면 다 됩니꺼! 가만 앉아 있지만 말고 좀 나와 보이소! 맨날 에헴 하고 방 구들목 짊어지고 있으믄 돈이 생깁니꺼? 밥이 생깁니꺼? 인자는 할배도 시상이 우째 돌아가는지 바깥에 나가 보이소!” 영수가 분하고 억울해서 할배에게도 한마디 했다.    

   “잔갑아! 우리 새끼야! 누가 그래 니를 섧게 하드노? 아이고, 내 새끼 가슴에 못이 박히뿐나 보네. 천지 신령님 우짜든지 구버살피주이소!”

   할매가 한바탕 시끄러운 소리에 깜짝 놀라 안채 마당으로 쫓아 나왔다.

   머슴 승이가 나서서 “잔갑아, 니가 참아라! 니가 욕 마이 보는 거 내는 다 안다.”하고 달랬다.

   “행님요, 말리지 마이소! 지도 사람입니더! 넘들처럼 배우지도 몬 하고, 소처럼 일만 해왔습니더! 맨날 욕이나 얻어 처묵고 사는 기, 사람 사는 기 맞습니꺼! 이래 사는 기 맞습니꺼? 야? 행님요!”   

   매형 동식이도 “처남이 고상하는 거 모리는 사람 없다 아이가! 처남이 그냥 못 들은 척해라.”하고 타일렀다.

   “매형! 이 집구석 누가 농사짓고 멕이 살리고 있습니꺼?”

   영수가 목이 타는지 우물에서 물 한 바가지를 퍼서 마시고 말을 계속했다.

   “매형! 말 좀 해보이소! 매형도 알지예?”

   “처남! 그마하고 밥 묵으로 가자.” 동식이가 말했다.

   “지도 인자 넘들처럼 살고 싶습니더. 욕 안 얻어묵고, 안 두드리맞고, 그래 살랍니더.”

   영수가 바가지로 찬물을 떠서 머리에 퍼부었다.

   할매가 장독대에서 물을 끼얹고 있는 손자를 부둥켜안았다.

   “잔갑아! 잔갑아! 니가 우째 그래 마음이 상해갔고, 우짜꼬! 아이고! 천지 신령님! 조상님! 우짜든지 구버살피주이소!” 할매가 울먹였다.

   시에미가 울먹이는 것을 보고 어메가 신세 한탄을 했다.

   “아이고! 저 우에 아재 집은 오순도순 맨날 웃고 사는데, 우리 집은 고함이나 지르고 와 이렇노! 이넘의 무신 팔자가 이래 사납노! 천지 신령님, 우짜든지 잘 보살피주이소!”

   한바탕 시끄러운 소리가 담장 너머 이웃에 다 들리고 마당이 소란스러웠다. 아배는 안방에서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그날 밤 저녁을 먹고 나서 영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승찬이 형은 전문학교에 다니고, 막내 동생 영철이도 국민학교에 다니는데, 아들 삼 형제 중에서 자기만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하고 죽으라고 일만 해왔다. 지게를 지고 가다가 동네 동무들을 만나면 창피하기도 했고, 자신이 초라해 숨고 싶을 때도 여러 번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애비한테 욕만 얻어먹고 매를 맞고 자랐으니 어찌 가슴에 억울함과 서러움이 쌓이지 않았겠는가. 더 이상 이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식구들이 모두 자는 야심한 밤에 그는 가방을 꾸렸다.

   바깥마당에서 뒤란을 쳐다보니 달이 언덕 위 탱자나무 가시울타리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었다. 그가 마을을 벗어나자 달이 두둥실 떠올라 앞길을 훤히 비추어주었다. 아배 억압에서 풀려난 그는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벌고개를 넘어가면서 뱃속에 든 울분을 토해내며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져나갔다. 밤길을 걸으면서 영수는 생각에 잠겼다. 아배의 횡포와 패악질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왔지만 갈 곳이 마당치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영수가 사라진 것을 안 아배는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넘의 손 하나 지대로 간수 몬 하고! 니는 뭐 했노? 어데로 갔는지 찾아바라!” 아배가 어메를 타박했다.

   “와? 그 아가 집을 나갔는지, 이녁이 더 잘 알 끼 아이요!” 어메가 핀잔을 주었다.

   “뮈시라꼬! 이넘의 여편네가 인자 보이, 잔갑이한테 바람을 넣언가 보네! 어데로 갔는지 퍼뜩 안 찾아보나!”

   집안이 시끌벅적해지자 사랑채에서 할매가 안채로 건너왔다.

   “와 이라노! 시끄럽다 마! 야들아 고마해라. 너거가 싸운다꼬 집을 나간 잔갑이가 들어오겄나?”

   할매는 입버릇처럼 “아이고! 천지 신령님! 조상님! 우짜든지 구버살피주이소! 우짜든지!”하던 말을 되뇌며 두 손을 모았다.

   영수가 없는 하동장댁에서는 승이와 동식이 힘만으로는 보리타작을 마무리하지 못해 품삯을 주고 일꾼을 샀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시가 난다고 했는데, 영수가 없는 보리타작은 곱절이나 힘들었다. 그동안 영수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였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아이고! 잔갑이가 없으니께 심이 배로 들어가네!” 승이가 말했다.

   “내도 심이 마이 들어가네. 우리 처남이 장골이라 일도 마이 했제.” 동식이가 응답했다.   

   타작한 보리 알곡을 바깥마당에 멍석을 펴고 말리는 것도 힘들었다. 아배나 어메는 들지도 못하는 알곡 가마니를 승이 혼자 옮겨 멍석에 쏟아붓고 가래로 펴서 오전 내내 말리고, 한낮에 가래로 한 번 더 저어주고 해 떨어지기 전에 보리 가마니에 다시 담아 옭겼다.

   영수가 있었더라면, 승이와 둘이서 손발이 척척 맞아 그리 힘들지 않았을텐데, 아무리 힘이 좋은 승이지만 혼자 가마니를 들고 옮기는 게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허리야!” 승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해가 지고 나면, 보리가 눅눅해지기 때문에 제시간에 보리를 담아야 했다. 아무리 바빠도 아배는 코빼기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보리는 늦가을에 씨를 뿌리면, 이듬해 이른 봄에 새싹이 올라오고, 봄 서릿발에 뿌리가 들뜨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보리밭으로 나가 들뜬 보리 뿌리를 밟아주고, 그러고 나면 일손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품에 비해서 목돈을 쥘 수 있어 보리농사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여름이 가기 전에 모심기를 끝내야 한다. 영수가 없는 하동장댁은 모내기도 품삯을 주고 일꾼을 사서 했다. 승이와 동식이가 소와 쟁기로 논바닥을 갈아엎고 써레질을 했다. 쇠 써레질을 하고, 이어서 나무 써레로 흙을 부드럽게 갈면서 풀과 보리 깍지를 제거했다. 나무 한 그루도 그늘막조차도 없는 허허 들판에서 사람이나 소나 지쳐서 골병이 들었다.

   “아이고! 허리야! 처남이 있어으마, 교대로 일하믄서 심이 덜 들었을 낀데.” 써레질하고 논두렁으로 나온 동식이가 말했다.

   “그라마! 잔갑이가 있어으마, 우리 둘이 하는 것보다 훨씬 심이 덜 들었제! 잔갑이가 장골 아이가!” 승이가 말을 이었다.

   써레질을 마치고 난 두 사람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아낙들이 모판에서 쪄낸 모를 다발 채 논의 군데군데에 던져 놓았다.

   모심기를 시작했다. 승이와 동식이가 논두렁 양쪽에서 마주 보고 서서 못줄을 잡고 “자아!”하고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못줄을 일정한 간격으로 놓고, 아낙들이 허리를 굽혀 일제히 모를 심었다. 한 줄 모심기가 끝나면 또 “자아!”하고 못줄을 옮기고 다시 모를 심고, 아낙들은 종일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몸이 천근만근이 되어, 한낮 내내 논바닥에서 살았다.  

   종일 모내기를 하다 보면 거머리가 다리에 붙어서 피를 빨아먹고, 보리 깍지가 손톱 밑을 찌르고, 게다가 손발은 물에 퉁퉁 불어 허옇게 변했다. 모두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품을 팔면서 일했다. 해가 중천을 지나 서산 고갯마루에 걸리면, 승이와 동식이는 논두렁 외길을 따라 쟁기와 써레를 지게에 짊어지고 소를 몰고 마을로 돌아왔다.

   한낮의 시끌벅적한 “자아!”하고 못줄 놓은 소리와 “이랴!”하고 소를 부리는 소리는 어둠에 묻히고, 들판은 개구리 울음소리와 개똥벌레 반딧불이의 밤무대로 바뀌었다.

   가을 추수도 하동장댁은 사람을 사서 했다. 영수가 없다는 게 실감이 났는지 농사일에 무관심하던 아배도 아들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넘의 손! 어데 가서 죽었나, 와 이리 연락이 없노? 아무도 잔갑이 소식 못 들었나?”

   아배가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식구들에게 물었다. 식구들은 모두 멀뚱한 표정으로 아배를 쳐다보았다.

   “이녁이 잔갑이를 내쫓았는데, 누구보고 하는 소리인교? 이녁이 잔갑이 잘 달게 갔고 델꼬 와야제.” 어메가 말했다.

   “이넘의 손, 집구석에 들어오기만 해바라······.”

   아배는 이전에 비해 기가 많이 꺾이고 풀이 죽어서 아내의 말에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밥만 먹었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고 밤하늘엔 초승달이 떴다.     

   영수는 집을 나오자 갈 곳이 없어 며칠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주머니에 가져온 돈도 거의 동이 나고 막상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었다. 공장에 취직하려고 해도 글을 모르니까 이력서를 쓸 수도 없었다. 그는 건설 공사판을 찾았다. 공사판 감독을 만나 인부가 더 필요하지 않냐고 물었다. 감독이 영수 덩치를 보고 믿음직스러워 그에게 여기서 일하라고 했다.

   영수는 건설 공사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배운 게 일이고, 가진 게 힘뿐이니 이것 말고 달리 할 게 없었다. 비록 거친 공사판에서 막일하고 있지만, 할배와 아배 잔소리와 억압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속이 후련했다. 세상에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공사장 현장 감독도 영수가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힘든 일도 척척 잘해 내서 야간 당직까지 맡겼다. 영수는 숙직실에서 생활하면서 야간에 공사장을 지켰다.

   낮에 일한 일당과 밤에 숙직하면서 받은 월급이 제법 쏠쏠했다. 그는 가까운 은행에 가서 통장도 만들고, 월급이 들어오면 꼬박꼬박 저축했다.

   하루 일을 마치고 감독이 영수에게 막걸리 한잔하게 오라고 해서 그는 공사판 인부들과 술자리에 어울렸다. 영수는 술은 못하지만, 저녁 먹고 심심하던 차에 세상 사는 이야기나 들을 겸 순순히 감독의 부름에 응했다.

   인부들끼리 연거푸 술잔이 오가고, 고향 이야기와 자식들 자랑 끝에 전쟁 이야기가 나왔다.

   “일본 넘들이 인자는 중국 만주도 다 묵어버맀고, 대동아전쟁을 일으키가꼬, 아세아를 야금야금 쳐들어가고 있다 카데?” 감독이 말했다.

   “아이고! 만주 땅에는 괴뢰국에 꼭두각시 앉히놓코, 일제가 뒤에서 장난질 치고 있제, 시방 우리나라 여게 저게 쇠붙이는 남아 있는 기 없고, 식량도 공출이다 캐서 뺐들어가서 허리띠 졸라메고 지낸다 안 카요.” 털북숭이 박씨가 말했다.

   “시방 들리는 소문에, 사람도 전쟁터에 끌고 가고, 탄광에도 끌고 간다 카데요?” 덩치가 건장한 김씨가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영수 총각은 시방 몇 인기요?”

   털복숭이 박씨가 묻자 감독이 대신 답했다.

   “인자 한창 팔팔한 나이 아인가! 열일곱인가?”

   영수가 고개를 끄떡이자 모두 “강제징용 잡히갈라”하면서 걱정했다.

   밤이 늦어 술자리가 파하고 영수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밤늦게 숙직실로 돌아왔다. 인부들이 하던 얘기가 귓가에 맴돌았다. 마음이 초조해지고 긴장이 되자 예의 입안이 말라 침을 꿀꺽 삼켰다. 주전자에 있는 물을 한 사발 가득 따라 마시고 자리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영수가 집을 나오고 해가 바뀌어 봄이 왔다. 어느 날 감독이 영수를 불렀다. 사무실로 들어가 보니 외사촌 성국이 형이 와 있었다. 영수는 깜짝 놀랐다.

   “아이고, 행님! 여는 우짠 일인기요? 우째 알고 여까지 왔습니꺼?” 영수가 말했다.

   “내 아는 사람이 니를 닮은 청년이 공사판에서 일한다고 말해주어서 혹시나 하고 와 봤다 아이가!” 성국이 형이 말했다.

   “동상! 고모 아재도 마이 늙었고, 동상한테 그래 심하게는 말 못할 끼라. 내하고 같이 가자! 우리 집에서 매칠 묵다가 집에 들어가자.”

   성국이 형이 영수를 바라보면서 두 손을 잡았다.

   “알아십니더. 행님! 이래 멀리까지 찾아왔는데, 지가 우짜겠십니꺼? 생각 좀 해보겠십니더.“  

   ”그래! 동상이 잘 생각해서 빨리 돌아오도록 해라. 그라믄 내는 동상이 집에 돌아오는 거로 알고 가꺼마.“

   ”예, 여 일도 이달을 채우야지예. 지가 빠지믄 일꾼도 새로 뽑아야 하니께 안주까징 시간이 있십니더. 연락드리겠십니더.” 영수가 대답했다.

   성국이 형이 다녀간 후, 감독이 잠깐 보자고 영수를 불렀다.

   “영수 총각! 와 외사촌 행님이 이리 찾아왔노?” 감독이 물었다.

   영수는 집을 나오게 된 사정을 감독에게 이야기했다. 영수 얘기를 듣고 있던 감독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뭐시라꼬! 장남하고 막내 동상만 핵교 보내고, 영수 니는 핵교도 안 보내고 머슴처럼 일만 시킸다꼬! 우째 그래 참고 살았노?” 감독이 침을 튀기면서 말했다.

   그의 목에는 힘줄이 불끈 돋았다.

   “시상에 무신 그런 아부지가 다 있노!”

   “지도 성질도 나고 하도 분하고 억울해서 집에 있기가 싫은 기라예. 그래서 그냥 집을 나와버맀십니더.” 영수가 말했다.

   “내가 이바구 듣기만 해도 열불통이 터지는데, 영수 니는 오죽했을라꼬! 내 같아도 나와뿟을 끼다. 그런 집구석에 말라꼬 들어가노!” 감독이 자기 일 인양 입에 거품을 품었다.

   “아이고 우리 영수 청년 불쌍해서 우짜노!” 감독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계속했다. “영수 청년! 걱정 붙들아메고, 내하고 공사판에서 일하자. 일거리 여게 저게 쌔고 쌨다! 천지 삐까리다! 공사판에서 일하믄서 돈도 벌고 마음 편하게 지내야제, 안 그렇나!”

   “고맙십니더, 감독님! 잘 알겠십니더.” 영수가 말했다.

   영수가 성국이 형과 약속했던 한 달이 지났다. 외사촌 성국이 형이 영수를 데리러 공사장에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꺼! 지 알겠지예?” 성국이가 감독에게 말했다.

   “아, 예! 영수 청년 외사촌 행님 아입니꺼!”

   “우리 동상 지금 어데 있십니꺼?”

   “아! 그기 말입니더. 허 참! 뭐라꼬 말해야 하노?”

   “감독님! 와 그라십니꺼? 우리 동상한테 무신 일이 생깄십니꺼?”

   “아입니더. 그쪽이 가고 나서, 영수 청년이 다른데 일자리 알아본다꼬 여를 나갔십니더.”

   “뭐시라꼬예? 딴 데로 갔다고예! 어데로 갔는지는 모르십니꺼?”

   “이거 참, 난처하게 생깄십니더. 영수 청년이 말도 없이 여를 나갔으니께, 지도 어데로 갔는지 모릅니더. 공사판이 전국에 한두 군데도 아이고······. 참! 공장에 취직했는지도 모르지예. 여서 일할 때, 공장 이바구도 지한테 몇 번 물었거던예.”

   “아이고! 이거 우짜노? 고모부도 고모도 동상이 지하고 같이 집에 돌아올 끼라꼬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우짜믄 좋노?”     

   감독과 성국이는 서로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그렇다고 영수가 ‘나 여기 있소!‘하고 불쑥 나타나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고, 이디 있는지 소문이라도 들어야 찾아 나설 게 아닌가.

   “아이고! 이를 우짜믄 좋노? 감독님! 지가 부탁 하나 하입시더. 그래도 감독님 이 바닥에 몇십 년 하셨으니께 웬만한 공사장 감독들은 다 알끼 아입니꺼? 우리 동상 어데 있는지 좀 알아바주이소. 부탁합니데이.”

   성국이가 입장이 곤란해져서 이 말을 남기고 공사장을 떠났다.

   한해가 지나가고 다시 봄이 찾아왔다. 영수가 집을 나온 지 햇수로 두 해째다. 영수는 오늘도 공사장 일을 마치고 함바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있었다. 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함바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왔다.

   “어? 어! 감독님 여는 우짠 일이십니꺼?”

   “하이고, 여 있어꾸마! 내가 영수 청년 찾을라꼬 공사장 여러 군데 수소문 해꾸마. 우째 이래 멀리까지 왔노?” 예전 감독이 말했다.

   “영수 청년! 감독님한테 내가 이바구 다 들었꾸마. 잘 생각해서 여게 일 정리하고 집에 들어가도록 혀야제?” 현장 감독이 말했다.

   “영수 청년 외사촌 행님이 메칠 전에 우리 공사장에 찾아왔구마, 데꼬 갈라꼬. 내가 입장이 얼매나 곤란했는지······. 당신 외사촌 행님이 내가 영수 총각을 빼돌맀다꼬 생각하는 눈치인 기라!”

   영수가 저녁 밥상을 물리고, 두 사람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래서 내가 마! 불쑥한다는 말이 한번 알아보겠다고 해부맀제! 나도 공사장판에 벌써 삼십 년 넘게 뼈를 묻고 살아왔응께 전국에 감독들 얼굴은 거지 다 알고 있제. 그래서 내가 여게 저게 연락해서 알아낸 기라.”    

   이번엔 영수 처지가 난처하게 되었다. 예전 감독이 자기 일도 아닌데, 먼 데까지 찾아와 통사정하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알았십니더! 감독님 성의를 바서라도 말씀대로 하겠십니더!”

   영수가 공사장 일을 마무리하고 외가 농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면서 굳게 마음 먹었다. 이제부터 할배한테도, 아배한테도 무지렁이처럼 “예! 예!”하고 호락호락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마침 농장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영수 얼굴을 알아보고 성국이에게 연락했다.

   “영수야! 우째 이래, 니는 연락도 안 하고 딴 데로 가 뿌맀노!” 성국이 형이 영수를 부둥켜안으며 말했다.

   “아이고! 우리 동상 잘 왔다! 잘 생각했다, 동상!”  

   영수는 며칠 동안 외가 농장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일을 거들어주었다. 하루는 바람도 쐴 겸 해서 해거름녘에 외가 종답이 있는 강둑을 걸었다. 그는 아랫마을 어귀쯤에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예쁘장한 처녀를 보았다. 그녀도 자기 외가에 와서 잠시 일을 거들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봉현마을 옆 동네에 사는 순이였다. 순이는 올해 열일곱, 영수보다 나이가 한 살 적었다. 영수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이 아가씨가 누고? 성국이 행님한테 물어보믄 알겠제?’

   저녁담에 농장 소들에게 저녁을 주러 성국이 형이 농장에 들렀다. 영수와 함께 사료와 풀을 구시에 듬뿍 담아주고 일을 마쳤다. 영수가 머뭇거리자 성국이 형이 영수에게 먼저 물었다.

   “와? 니 내한테 할 말이 있나? 말해바라!”

   “저기, 저 행님! 지가 아까 전에 강둑을 걸어서 외가 종답이 있는 아랫마을로 가다가 어떤 처자를 봤는데, 혹시 누구인지 행님은 아십니꺼?”

   외사촌 성국이 형이 한참 생각하다가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

   “아하! 저 아랫마을에 저거 외가 다니러 온 이쁘장한 처녀가 있다 카더라. 아매도 너거 동네 옆에 산다고 카는 거 같든데······.”

   영수가 안달이 나서 외사촌 형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와? 니 그 처녀가 마음에 들더나?” 성국이 형이 물었다.

   “아! 예. 물동이 이고 가는데 얼굴도 반반하고 궁금해서 물어본깁니더.”

   성국이 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영수에게 오늘은 일찍 농장 숙소에 들어가서 쉬어라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농장 숙소로 들어온 영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마음이 설레고 흥분이 되어서 이부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고 강둑을 걸으면서 아랫마을로 마실을 나갔다. 마을은 벌써 적막에 휩싸여 개구리 울음소리만이 요란했다. 숙소로 돌아온 영수는 곰곰 생각하다가 결심했다.   

   ‘그래, 집에 들어가자! 옆 동네 그 처녀 얼굴 보러 우리 종답에 가믄 될 꺼꾸마.’

   영수가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 날 외사촌 성국이 형에게 봉현마을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영수는 외사촌 성국이 형과 함께 봉현마을로 향했다.

   “아이고! 잔갑아! 니 여태 어데 있었더노?”

   대문으로 들어서던 영수를 보고 할매가 달려와 손자를 얼싸안았다. 어메가 밭일하다가 아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안채 마당으로 뛰어왔다.

   “아이고! 잔갑아! 우째 그래 소식도 없이 인사가 무정하노! 잘 왔다. 얼른 손 씻고 밥 묵자”

   그날 하동장댁 식구들은 오랜만에 웃으면서 저녁을 먹었다. 아배도 할배도 돌아온 영수에게 뭐라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영수도 제법 사내 티가 나기 시작했다. 코밑에 솜털이 거뭇거뭇해지고, 키는 아배 보다 컸고, 덩치는 머슴 승이에 버금갔다. 힘도 장사다.

   오늘도 영수는 지게를 지고 먼 산으로 승이와 함께 나무를 하러 갔다. 두 사람은 반나절이나 걸어서 억새 계곡에 도착했다. 목이 마르던 참에 계곡물을 두 손으로 떠 마시고 싸 왔던 꽁보리밥에 묵은 장아찌를 함께 먹었다. 시장해서 먹는 보리밥은 꿀맛이었다. 동네 어른들이 ‘시장이 반찬이다.’라고 하는 말이 생각났다.

   점심을 배부르게 먹고 누워서 잠시 뭉게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바라보다 승이가 먼저 일어났다.

   “잔갑아! 인자 일어나서 나무하자! 시간이 퍼뜩 가뿐다!”

   “야, 행님요!”

   영수는 새끼를 지게 밑에 세 가닥으로 가지런히 놓고 억새를 한 다발을 베서 그 위에 놓았다. 그리고 지게를 억새 위에 걸쳐놓고 억새 다발을 그 위에 올렸다. 억새는 어른 키보다 커서 금세 한 짐이 됐다. 승이도 벌써 새끼줄로 나뭇동을 묶었다. 영수도 새끼줄로 억새를 조여 매고 지게를 고정시켰다. 먼저 승이가 지게를 일으켜 세우는데 영수가 뒤로 가서 밀고, 승이는 앞에서 댕기며 지게를 일으켜 세우고 작대기로 지게를 바친 뒤, 이번엔 영수 나뭇동을 승이가 뒤에서 밀고, 영수가 당기며 지게를 세우고 작대기로 받쳤다.

   “잔갑아! 고상했다. 인자 지고 내려가 보자!”

   “야! 행님이 앞에 가이소. 내 따라 갈끼라!”    

   비탈진 산에서 나뭇짐을 짊어지고 내려오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도 승이는 잘도 내려갔다. 영수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돌부리에 차이고 나무뿌리에 걸려 비틀거리다가, 겨우 작대기로 버텨서 중심을 잡고 힘겹게 마을로 내려왔다.

   마을 어귀에 이르자 승이가 언덕에 지게를 내려놓고 쉬어가자고 했다.

   “인자 보이, 잔갑이도 장골이네! 깔딱 길도 잘도 내리오더구마!”
    “아이고,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어예. 그래도 행님이 하는 거 보고, 작대기를 언덕 쪽으로 바치믄서 내리오니께, 훨씬 심이 덜 들었지예.”

   두 사람은 다시 지게를 짊어지고 외딴 오두막과 산골 마을을 지나서 개울을 건너 산모퉁이를 돌아 벌고개까지 왔다.

   봉현마을 초가지붕이 보였다. 고개에서 지게를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두 사람은 다시 지게를 지고 마을 웃등 어귀로 들어섰다. 웃샘에서 물을 길어 오던 마을 아낙네들이 한마디씩 했다.

   “아이고마! 영수가 지고 오는 나뭇동 좀 보소!” 부녀회장이 말했다.

   “산등이 같이 큰 짐을 지고 왔고만! 장골이네! 하동장댁에 장사가 났네! 장사가!” 샘에서 물을 기르던 아낙들 모두 입을 모았다.

   영수와 승이는 나뭇짐을 바깥마당에 엊그제 해왔던 나뭇동과 함께 쌓았다. 제법 작은 동산처럼 보였다.

   하동장댁 농사는 기골이 장대한 영수와 머슴 승이가 다 지었다. 영수는 집안 대소사에 힘깨나 쓰는 일은 앞장서서 하기도 했다. 할배도 할매도 그런 손자를 보면 흐뭇해 가슴이 벅찼다. 할매가 지나가는 소리로 할배에게 쓴소리를 했다.

   “시상에! 내가 둘째 손자, 국민학교라도 보내서 까막눈 면해 주자꼬 할 때는 언제고, 인자 와서 손자가 장하다 카면, 무신 소용 있는교!.”

   할매가 혀를 끌끌 차며 할배에게 핀잔을 주자, 할배도 이에 질세라 한 마디를 내뱉었다.

   “씰데 없는 소리! 이 할망구가 노망이 들었나, 와 안 하던 소리 하노!”

   하동장 외고집이 아직도 정정하다. 할배는 역정을 내고 바깥마당으로 나갔다. 안마당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배도 머쓱해서 하던 일만 계속하고 있는데, 어메가 아배를 흘겨보며 핀잔을 주었다.

   “자알 한다 아입니꺼! 일만 할 줄 알지, 일자 무식꾼인데, 남들 앞에 가믄 말도 한마디 지대로 할라꼬!”

   어메가 비비 꼬며 아배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기세등등하게 서슬 시퍼렇던 아배도, 이젠 작은아들이 자기보다 기골이 장대하여 마을 사람들이 일등 일꾼이라는 소리를 하기에 한풀 꺾였다. 어메 말에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고 뒤란으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영수는 종중논에 열흘에 한 번꼴로 가도 될 것을 거의 매일 들렸다. 이를 눈치챈 승이가 한마디 했다.

   “잔갑아! 니 오늘 또 종답에 갔더나? 만다꼬 맨날 그 가노?”

   영수가 머뭇거리자 승이가 한마디 더 했다.

   “니 순이 볼라꼬 거 가제!”

   그는 당황해서 “아입니다!, 나락이 잘 커야 하는데 시방 그기 통 시원찮네예!”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그 말이 싫지 않은지 “행님, 지가 그래 보이는교?”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순이는 영수에게 찾아온 첫사랑이다. 순이 생각만 하면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저도 모르게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영수는 우연히 순이와 마주치면 입도 한 번 제대로 벙긋 못하고, 곁눈질로 흘깃흘깃 쳐다만 보고 지나쳤다. 순이도 그런 영수가 싫지는 않았다. 두 남녀는 이제 한창 봄날처럼 생기발랄하고 명자꽃처럼 붉었다.

   영수는 꿈속에서 순이를 만났다. 순이가 빨래터에서 빨래를 마치고 대야를 머리에 이려다, 이고 있던 따비가 빠져버렸다. 순이 몸이 휘청하였다. 영수가 재빨리 순이를 붙잡는다는 게 품에 안아 버렸다. 영수 품에 안긴 순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니, 클 날 뻔했다! 내가 안 붙잡았으믄 넘어졌다 아이가! 인자 괘안나?” 영수가 말했다.

   순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색하고 대답했다.

   “응, 괘안타. 얼른 놔 도고! 사람들 본다 아이가!”

   꿈속에서 순이를 안아 본 그날 밤 영수는 처음으로 몽정을 했다. 잠결에 끈적끈적한 액체가 사타구니에서 물씬 뿜어나왔다. 그는 정신이 몽롱해지고 온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날 밤 이후 영수는 자주 몽정을 하였다. 혹여 오늘 밤에도 꿈속에서 순이를 다시 안아볼 수 있을까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영수는 일찍이 종답으로 가서 물꼬를 트고 논에 물을 대고 나서, 한참 어슬렁거리며 논두렁을 왔다 갔다 하였다. 울타리 너머로 순이가 빨래하러 대야를 이고 나오는 게 보였다. 영수는 얼른 물꼬를 틀어막고, 용기를 내어 빠른 걸음으로 순이를 뒤쫓았다.

   “순이야! 빨래하로 가나 보네. 그 쫌만 서 바라, 내 할 말이 있데이.”

   “말라꼬, 무신 할 말이고?” 순이가 말했다.

   “니 오늘 저녁 묵고 내 좀 보자. 저, 느티나무 있는 데로 나온나!”

   “와? 울 아부지 알면 난리 나는데......” 순이가 말했다.

   “꼭 나와야 한다, 내 거서 기다리고 있으꺼마!”

   영수는 할 말을 마치고 윗마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쿵쾅거리며 마구 뛰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영수는 순이를 만날 생각에 흥분이 됐다. 그날 밤 영수는 순이와 처음으로 데이트를 했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두 사람을 비추고 두 그림자가 무언극처럼 움직였다. 밤은 깊어가고 달빛이 구름에 가리자, 두 남녀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봉현 들판을 비추고, 두 사람은 나란히 느티나무 정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순이야, 내는 니한테 장개 들 끼다! 알았제?”

   영수가 으스러지게 순이를 끌어안았다.

   순이가 수줍은 듯 영수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얘기했다.  

   “그래. 내는 니한테 시집갈 끼다!”

   밤이 깊어가고 초가에 호롱불이 하나둘 꺼져갈 무렵 영수는 순이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부자리에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새벽 첫닭이 울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영수는 삽을 둘러메고 종중논을 둘러보러 아랫마을로 향했다. 한 처녀가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수가 논에 물을 대고 다시 아랫마을 어귀로 돌아오자, 그 처녀도 집 밖으로 나왔다. 담벼락에 숨어 몰래 기다리고 있던 처녀가 얼굴을 내밀고 환히 웃었다. 영수도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저녁을 먹고 영수는 승이를 따라 마을회관으로 놀러 갔다. 동네 노인들과 아낙들, 청년들이 모여서 농사 이야기 끝에 전쟁 이야기를 꺼냈다. 일제가 몇 년 전부터 중국하고 아시아를 야금야금 침략해서 땅을 차지해버렸고, 이제는 바다 쪽으로 더 큰 전쟁이 벌어질 거라고도 했다.

   전쟁 소식을 들은 영수는 마음이 찹찹했다. 주민들도 초조하고 불안하기는 영수와 마찬가지였다. 승이가 영수에게 늦었으니 자러 가자고 해서, 집으로 오는 길에 영수가 물었다.

   “행님은 하나도 걱정이 안됩니꺼? 일제가 우리 동네까징 쳐들어오믄 우짤낍니꺼?”

   “일제가 뭐 할라꼬, 이 촌 구석까징 쳐들어오겠노? 차도 많고 공장도 많은 도시가 수두룩한데······.” 승이가 말했다.

   영수는 승이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이부자리에 누워서도 얼른 잠이 오지 않았다. 괘종시계가 열한 시를 알리고 영수도 선잠이 들었다.

   ‘영수야! 빨리 이리로 온나. 여 와서 숨어야제. 비행기가 또 총 쏠 끼다. 니 그 있으믄 클 난다! 어서 이리 온나!’ 동수가 불렀다.

   ‘얼른 가꾸마. 내 발에 뭐시 걸맀다 아이가! 발이 안 띠진다! 우짜꼬?’ 영수가 소리쳤다.   

   비행기 폭격 소리가 요란하고, 영수가 있는 곳은 숲이 바로 앞에 보이는 들녘이었다. 하늘에서 보면 영수가 바로 보였다. 군부대에서 설치한 철조망에 영수 옷이 찢기고 신발이 걸려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용을 써보아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비행기는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할메! 어메! 내 좀 살리주이소!’

   영수는 ‘아! 인자는 죽었구나. 철조망에 걸리가꼬 발이 안 빠지는데, 우짜믄 좋노! 내 좀 살리도······.’       

   영수 얼굴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전신이 땀에 흠뻑 젖었다. 엉엉 울다가 용을 쓰면서 발을 빼내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할매······ 어메······, 경희야······.’

   몸을 철조망에서 빼내려고 용을 쓰고 울어서 영수 얼굴은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이 되었고 손등은 철조망에 긁혀서 피가 줄줄 흘렀다.    

   영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철조망 밑에 엎드렸다. 기관총 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가까이에 폭탄이 떨어졌다.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았다. 비행기 소리가 멀어져갔다.

   눈을 번쩍 뜨고 밖을 보니 어슴푸레하게 창문이 보였다. 이부자리에서 발을 들추어 보고 손도 만져보았다. 멀쩡했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영수는 입안이 마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전쟁터로 끌려가면 폭탄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팔과 허벅지에 소름이 돋고 공포심이 덮쳐왔다. 그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새벽녘에 수탉이 홰를 치며 꼬끼오하고 동네 수탉들도 모두 꼬끼오하고 울었다. 대청 괘종시계는 새벽 세 시를 알렸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터라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나니 졸음이 쏟아졌다. 방에 들어와 드러누웠는데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벌써 반나절이 지났다. 한숨을 자고 일어나 동네 마실을 나갔다. 마을회관에 주민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회관 방으로 들어갔다.   

   회관에서는 일제 대동아전쟁 이야기가 소문에 꼬리를 물고 주민들 입을 통해 퍼져나갔다.

   “아, 거시기! 일제가 아시아를 다 차지해 뿌렀다 안 카요!” 동수 할배가 핏대를 올리면서 말했다.

   노인회장이 나섰다.

   “읍내 장날에 부면장을 만났는데, 일제가 만주를 차지해서 거기다가 만주 괴뢰국을 세았다 카고, 아시아도 다 묵었다 카더라. 인자는 전쟁이 어데로 번지나갈지 아무도 모른다 카더라.”

   일순간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 회관에 모인 사람들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매일 새로운 지시가 관공서를 통해 내려오고, 이장은 이를 마을 주민들에게 알려주었다. 조선총독부에서 하달된 내용은 일제 찬양과 천황에 대한 충성 맹세 등 선전과 선동적인 문구 일색이었다.

   일제가 무기를 만든다고 쇠붙이란 쇠붙이는 다 걷어가는 바람에 가마솥에 도끼까지 다 동이 나버리고 제대로 된 살림살이 도구며, 농사지을 연장도 없었다. 나중에는 곡물까지 강탈했다. 하동장댁같이 부농인 집안엔 쌀뿐 아니라 콩이며 밀까지 조사해서 뺏어갔다.

   트럭이 주말마다 봉현마을 앞에 오면 마을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동안 더 가져갈 게 없어서인지 트럭은 오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도 평안을 되찾았다.

   여름이 지나고 초가을이 오자, 이번에는 공물이 아니라 사람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젊은 남정네를 징용한다는 소문이 돌고 남자가 없는 집은 계집아이를 끌고 간다고 했다. 이장은 일제가 하달한 내용을 마을회관에 모인 주민들에게 전해주었다.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가 뭉쳐서 서구 세력을 몰아내야 대동아가 함께 번영하고 잘 살 수 있다고 그 허울 좋은 대동아공영권을 선전해댔다. 다들 까막눈인 주민들은 뭐가 뭔지도 몰랐다. 글줄깨나 읽은 면서기나 할배는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할배는 하동장댁에 징용장이 날아오면 내심으로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봉현마을에도 전쟁 소문에 인심은 뒤숭숭해지고, 이웃 간의 왕래도 점점 멀어지면서 마을회관에 사람들 발길이 끊어졌다. 아랫마을 김 서방이 하동장 할배를 찾아와서 하소연했다.

   “어르신! 우리집 창고 곡석, 일본 넘들한테 다 뺏기고, 인자는 종자할 나락도 없십니더. 지발 나락 한 가마이만 빌리주이소! 어르신예!”

   “어허! 내가 빌리줄 나락이 어데 있다꼬! 우리 묵을 것도 모자랄 판이라.” 할배가 손사래를 쳤다.

   평상시 같았으면 나락 몇 가마니쯤은 하동장댁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빌려주고 가을 추수가 끝난 뒤에 돌려받기도 했다. 전쟁 소식이 잦아들고 곧 징용이 시작될 거라는 소문이 떠돌자 모두 제 살길 챙기기에 바빴다.

   저녁을 먹고 영수는 승이와 동네 마실을 나갔다. 동네 골목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얼씬거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을 어귀 느티나무 정자를 지나 방죽을 걸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행님요! 요새 동네 인심이 말이 아입니더. 양석 빌리는 것도 그렇코, 옆집 사람 얼굴 보기도 힘드네예. 전에는 아침저녁으로 담 너머 인사도 하고 지냈는데······.”

   “여게 저게, 온 사방에서 전쟁이 터졌다 카이 안 그라나. 일본 넘들이 우리나라 말고도 만주 땅에다 무신 허수아비 나라 하나 세았다 카데. 꼭두각시로 그 전에 중국 황제 하던 ‘푸이’인지 ‘풍’인지 카는 허수아비를 안칬다 카더만.” 승이가 말했다.

   “아이고, 우짜든지 우리 마을에는 일본 넘들이 쳐들어오지 말아야 할 낀데······.” 영수가 밤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방죽을 걸으면서 밑도 끝도 없는 전쟁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본 넘들이 오지 말라고 칸다고 안 오고, 오라 칸다고 오고 그라겐나? 그넘들이 얼매나 약에 빠진 넘들인데······ 그마, 자로 가자.” 승이가 말했다.

   밤이 깊어지자 스산한 가을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고 길섶에는 밤이슬이 내려 바짓단을 적셨다. 봉현마을은 호롱불마저 꺼져서 어둠 속에 잠겼다. 하동장댁 대청마루 남폿불만 깜박깜박 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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